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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공부하는 인간

입력 | 2013-04-13 03:00:00


공부 콤플렉스가 ‘엄친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면서요? 우리 공부가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라는 증거이겠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 방송국에서 5부작으로 ‘공부하는 인간’까지 만들어 ‘공부’가 다시 화제입니다. 하긴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도토리 키재기 같은 경쟁을 시키며 평가하는 나라에서 공부가 화제 아닌 적이 있었나요?

그 바람을 타고 누가 제게 묻더군요. 철학적으로 공부를 정의해 보라고. 묻는 사람에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에게 공부가 뭐냐고. ‘공부’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다 같은 공부가 아니니 그걸 철학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부가 생존인 이도 있고, 신분 상승의 기회인 이도 있고, 지루한 일상인 이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계발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어렸을 적부터 베다를 암송해야 하는 브라만들에게는 운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나’를 알아가는 통로겠습니다. 당신에게 공부는 무엇입니까?

확실한 건 공부할수록 공부가 재밌지 않고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상한 공부의 나라, 대한민국이 이 나라 청소년들에게는 참으로 삭막한 곳이라는 겁니다. 과식이 몸을 해치듯 암기해야 할 정보량만 많은 공부는 정신의 독입니다. 이번 5부작도 철저히 경쟁화된 암기식 우리 공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대화와 토론의 방법으로 공부하는 서구 공부를 동경하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론이 다 토론인가요? 수준이 맞지 않고 지향성이 맞지 않으면 토론은 무조건적인 암기보다도 더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암송이 중심이 되는 전통 동양 사회의 공부법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그건 단순한 암기가 아닙니다. 100번 읽으며 무조건 외라 한다고 해서 그걸 권위적인 암기식 교육이라 하는 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겁니다.

몇 년 전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에게 서양철학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주말을 해인사에서 지내면서 나는 천년의 전통을 배웠습니다. 빨간 날이 공부 휴일이 아니라 큰스님 제삿날이 휴일인 것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붙들었던 것은 스님들의 경전 외는 소리였습니다.

경전 공부는 어디서나 외는 것이 일차적인 공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지 않나요? 경전을 외다 보면 로고스가 몸에 붙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로고스가 몸에 붙으면 무엇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시절이 저만치 멀어져 가고, 진리가 어떻게 ‘나’를 자유롭게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경전을 욀 때는 우선은 자기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 목소리를 듣다 보면 함께 경전을 외는 다른 이의 목소리도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화음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소리는 정직합니다. 사람이 경박하면 소리도 경박합니다. 겉치레가 많은 사람의 소리는 꾸밈이 많아 오래 듣기 불편합니다. 그렇지만 백 번 천 번 외다 보면 소리가 사람을 바꿉니다. 소리가 내 빈 곳과 맺힌 곳에 울리면서 사람을 바꾸는 거지요.

자기 목소리에는 치유력이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듣다 보면 내 아픈 곳과 허기진 곳이 반응합니다. 한번 ‘지혜서’라고 하는 것을 소리 내서 읽어 보시지요. 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암기해 보시고 혼자 자꾸자꾸 암송해 보시면 그것이 암기법이 아니라 명상법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