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길 품은 집 지어주세요” 두 사람의 꿈이 통했다
송승훈 씨(위) 집 ‘잔서완석루’의 심장부는 5000여 권 책을 품은 2층 서재다. 건축가 이일훈 씨는 벽돌지붕 아래 아늑한 다락과 완만한 경사의 진입로 ‘책의 길’을 마련해 공간 위에 풍성한 드라마를 더했다. 남양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메일로 의사소통을 하자고 먼저 제안한 쪽은 건축가였다. 그가 건축주에게 처음 던진 질문은 방이 몇 개 필요한지, 부엌이 얼마나 커야 할지가 아니었다. “그런 것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먼저 송 선생님 자신이 ‘집에 대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찬찬히 되짚어보고 이야기해 주세요.”
매사 탐구욕 끓어 넘치는 성품의 건축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집에 대한 개괄적 가치관, 모양새에 대한 바람, 마당 서재 침실 욕실에서 꾸려가고 싶은 삶의 모습을 조목조목 정리해 보냈다. 첫 e메일을 읽은 건축가는 ‘소통 시간을 절약해야지’ 했던 속내가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젊은 의뢰인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도무지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반갑고 유쾌한 오산이었다.
1일 오전. 2층 서재 반원통 볼트(vault·아치를 길게 잇댄 구조)의 4.7m 높이 잿빛 벽돌지붕 아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100권의 책을 뒤져 찾아낸 건축가
건축주 송 씨는 책 신봉자다. 무엇이든 궁금할 때는 그 분야 서적을 최대한 많이 읽는 게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효율적인 배움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최대한 많이’란 기본 수십 권이다. “아무리 통달한 고수를 만난다 해도 한두 시간 몇 마디 들어서 뭘 알 수 있겠어요? 책을 뒤적이면서 의문을 스스로 풀어낼 때 비로소 배움이 얻어집니다.”
“불편하게 살자. 현대 건축의 거의 모든 문제는 편리함만 추구하다 생겨난 것이다. 밖에서 살자. 모든 공간이 ‘내부 공간’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 팬티 바람으로 잠깐 거닐 수 있는 외부 공간을 갖춘 집이 필요하다. 길게 늘려 살자. 좁은 집이라도 동선(動線)을 길게 만들어 많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자.”
이거다 싶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앉아 10년 치 건축 잡지를 쌓아놓고 이 씨 작품에 대한 글을 찾아 읽었다. 화장기를 배제한 그의 건축에는 녹나고 때 탄, 사람 사는 공간다운 흔적이 보였다. ‘쓰레기가 잘 어울리는 건축’이라는 비평도 마음에 들었다.
“머리카락, 지저분한 먼지가 섞여 있는 공간이 집이라고 생각해요. 더러운 것이 어우러져야 사람 사는 곳 아닐까요. 도면을 따라 그려봤는데… 아 이건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인터넷 뒤져서 사무소 번호 찾아내 한참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했지요.”
8년 전 여름. 처음 만나기 전 건축가 이 씨는 내심 ‘예의 바르게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는 ‘주택으로 시작해 주택으로 끝나는 것이 건축’이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다르다.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직원들 인건비도 챙기기 어려운 것이 대개의 주택 작업이다.
“살아오면서 신세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네들 덕에 그나마 사람 꼴 갖춰 살게 됐습니다. 저보다 더 모진 바람 맞고 지낸 그 벗들이 찾아와 한숨 한번 돌릴 수 있는 집이면 좋겠습니다. 책읽기 모임을 꾸려 움직이는 선생님들의 논의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한 기능입니다.”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소통으로 열어 낸, 바람길 품은 집
건축주는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을 원했다. 초임교사 시절 여름밤 태풍에도 바람 한 점 들지 않던 자취방의 끔찍한 기억 때문이었다. 위세를 부리지도 비웃음을 흘리지도 않는, 다소곳이 열린 모양새이길 원했다. 잔디 없는 마당, 나지막한 담장, 창문의 크기 높이 모양 방향이 여러 갈래인 침실, 햇볕과 바람이 사철 드는 욕실을 원했다.
집의 무게중심은 5000여 권의 책을 꽂아둘 서재였다. 송 씨는 “조금 어둡더라도 전깃불보다는 자연광에 오래 기대 책을 읽을 수 있는, 숨쉬기 편한 공간이면 좋겠다”고 청했다.
건축가는 받은 글마다 이곳저곳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바로바로 회신을 보냈다. ‘진짜 답변’은 공간에 꼭꼭 눌러 담았다. 이 집의 창은 모두 다 맞바람을 들이게끔 열 수 있다. 바람 통하지 않는 공간, 어느 구석에도 없다.
“숨 잘 쉬게 하는 출발과 그릇이 건축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얼마나 우매한가요. 바람 통하는 게 중요하단 걸 알면서도 유리로 일단 다 막아놓고 기계로만 해결하려 들어요.”
건축주는 또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곳에서 드문드문 잠시 멈춰 머물 수 있는 동선을 바랐다. 건축가는 2층에 오른 자리 바로 왼편에 양 벽을 책장으로 채운 ‘책의 길’을 내 거기에 답했다. 완만한 경사로 끝에 서재가 닿는다. 계단을 오른 뒤 곧장 서재만 보고 나아가는 방문객은 드물다. 바람과 볕이 은은히 맴도는 계단 끝 모서리. 그대로 드러누워 낮잠 청하도록 유혹하는 쉼표 같은 공간이다.
직사광선과 비를 막아줄 긴 처마를 툇마루 위에 올려달라는 요청에 건축가는 흥이 났다.
“현대건축은 지나치게 밝아요. 이미 밝은데 습관적으로 전등까지 켜죠. 사실 살림살이 집은 적당히 그늘을 품는 편이 좋습니다. 겉모양을 매끄럽게 하려고 처마 걷어내는 게 유행처럼 돼버렸는데… 어이없는 일이에요.”
처마를 넉넉히 얹은 1층 남쪽 방에는 한 꺼풀 걸러진 볕과 그늘이 언제나 함께 든다. 이 집에서 다섯 번의 여름을 보낸 송 씨는 에어컨을 놓지 않았다. 만일에 대비해 실외기 거치대와 에어컨 홈통은 마련해 뒀지만 살아보니 전혀 쓸 일이 없었다.
“아무리 밖이 더워도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있으면 괜찮다는 걸 몸으로 깨쳐 알았죠. 힘든 날은 한여름 일주일쯤? 선풍기 틀면 괜찮습니다. 여름밤 툇마루 처마 아래 누워 산바람 숲 냄새를 들이쉬면 혼자 너무 호강해서 세상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냉방을 하지 않으니 여름에는 관리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불을 때는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는 달마다 60만∼70만 원 정도. 총면적 190m²의 개인주택치고 적은 비용이다.
북동쪽 대문 바깥(왼쪽)과 남쪽 마당에서 바라본 모습. 송판 거푸집의 거친 표면 흔적을 살린 노출콘크리트 벽체 위로 벽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서재 지붕이 도드라져 보인다. 건축가는 모양내기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공간 만들기에 주력했다. 남양주=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82통, A4용지 208쪽 분량의 e메일이 쌓이는 동안 건축주는 틈날 때마다 관심 가는 건물들을 답사하며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쉼 없이 공부하는 건축주는 집에 대한 의견 조율을 소모적 논쟁 없이 간추리도록 해줬다.
송 씨는 처음에 한 건축 책에서 봤던 ‘통유리벽 서재’를 갖고 싶어 했다. 유리 외벽을 통해 책이 엿보이는 집. 근처를 빙빙 돌며 구경을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유리벽 안쪽에 온통 신문지가 붙어있었다. 이 씨는 “그 집 지은 건축가가 아마 책을 많이 보관해 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사광선을 쬐면 책이 금방 상합니다. 처음엔 보기 좋았겠지만 책이 점점 망가지는 걸 보고 상처에 붕대 감듯 신문지를 붙였겠죠. 치장만 요란한 레스토랑 통유리 와인셀러에 휘황찬란 조명 밝혀져 있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벽지에 바를 풀의 품질, 주방설비 문짝에 피해야 할 색깔, 계단 바닥의 미끄럼 정도를 꼬치꼬치 캐물어 확인하는 건축주를 상대하기. 이 씨는 “당연히 귀찮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결정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 던지는 질문이어서 귀찮음을 이길 수 있었죠. 좋은 의뢰인이란 사람과 집이 겉돌지 않도록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 건축가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되 이해하고 동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건축가를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송 선생님은 그런 의뢰인이었습니다.”
2005년 8월 23일 첫 메일로 시작한 집짓기는 2007년 5월 2일 첫 삽을 떠 그해 12월 30일 완공을 봤다. 소통과 이해에 1년 8개월, 집을 짓는 데 8개월이 걸린 셈이다. 대지 구입비를 포함한 총비용은 6억4000만 원이 들었다. 메일 묶음은 지난해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서해문집)에 추려 담았다.
글로 먼저 지어낸 이 집에 두 사람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낡은 책으로 채운 거친 돌집)’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원판의 탁본을 구해 현판을 파 걸었다. 대강 비워놓았던 대문 현판 자리에 맞춰 짠 듯 꼭 들어맞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연이 모든 것을 지어냈다.
▼ ‘나만의 집 짓기’ 송승훈 교사의 조언 ▼
■ 자재나 치장보다 ‘내 삶에 어울리는 공간 구성’ 고민하세요
“몇 평이에요?” “평당 얼마 들었나요?”
집 주인 송승훈 씨가 받는 질문은 대개 비슷하다.
시골로 이사해 집을 짓고 살겠다는 대학 후배가 전화로 조언을 구했다. 인터넷 정보를 살펴본 후배의 질문은 온통 ‘친환경 재료’에 대한 것이었다.
송 씨도 처음에는 그 후배와 같았다. 황토나 나무로 지으면 무조건 친환경 건물이 될 것 같았다. 콘크리트나 철골은 좋지 않은 재료인 듯했다. 이일훈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기와 얹은 지붕 아래 적당히 흙과 나무를 섞어 얽고 툇마루를 붙여 ‘친환경인 듯 보이는 집’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송 씨는 집을 짓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다음 두 가지를 조언한다.
① 시공사보다 건축가를 먼저 찾아라
건축가는 자기 마음대로 조각하듯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의뢰인이 꿈꾸는 삶의 모습을 실재 공간으로 구현하는 사람이다.
되도록 많은 건축 책을 읽고 눈에 밟히는 건물은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사진은 실물과 여러모로 다르다. 겉보기에 세련돼 보이지만 들어가 살기에는 고단한 집이 허다하다.
집을 통해 얻고 싶은 삶에 대해 건축가와 솔직하고 끈기 있게 대화하자. 궁금한 것을 질문하되, 건축가의 가치관과 경험과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주고 맡긴 일과 마음을 나눠 함께 이룬 일. 결과는 당연히 다르다.
②재료에 앞서 공간을 고민하라
외벽을 이끼로 감싸거나 황토로 벽을 쌓으면 생태적으로 좋은 건물일까. 황토는 습기에 취약해 콘크리트 벽체의 치장 정도로 절제해 써야 한다. 외형에 이끼를 덧댄다고 해서 그 안의 삶이 친환경적으로 변할 리 없다.
어떤 삶을 꿈꿔왔는가. 그렇게 살려면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원하는 바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살피고 조율할 숙제는 이런 고민들이다. 집 짓는 일은 옷 사 입는 일과 다르다. 살면서 두 번 되풀이해 겪기 어려운, 한 번의 기회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