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인 만드는 게임은 안돼” 착한 롤플레잉을 꿈꾼다
9일 정상원 띵소프트 대표(왼쪽)와 프로젝트 NT 개발팀이 캐릭터 원화를 검토하고 있다. 주요 인물 150명을 그린 뒤 이들의 조합을 통해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캐릭터를 만든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빨간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이런 대사와 함께 화면 속에서 다채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동감 넘치고 자연스럽다.
“저희 캐릭터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 40가지 정도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동작과 표정은 거의 다 구현할 수 있어요.”
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게임회사 띵소프트 회의실. 내년 출시 목표, 아직 정식 출시명은 비밀이라는 온라인게임 ‘NT’(프로젝트명)의 그래픽 담당 이주현 팀장이 말했다. 데모 영상에서는 이제 원피스 차림의 파란 머리 소녀가 나와 치마를 털고 한 바퀴 돌더니 이쪽을 흘겨본다. 초당 프레임(화면) 수가 많아 어지간한 만화영화보다 훨씬 동작이 부드럽다. 저렇게 예쁜 캐릭터들이 저렇게 실감 나는 반응을 해준다면 플레이어들이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게임쇼에서 프리뷰 영상이 공개됐을 때도 이런 부분이 화제가 됐다.
프로젝트 NT는 현재 국내에서 개발되는 온라인게임(여러 장르가 있지만 여기서는 ‘리니지’ 같은 대규모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을 칭한다) 중 특히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넥슨 대표이사를 지낸 1세대 개발자인 정상원 띵소프트 대표는 이 복귀작에서 ‘기존 온라인게임의 한계를 벗어나겠다’며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차가운 느낌의 3차원 컴퓨터그래픽(CG)에서 벗어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의 셀 애니메이션 분위기를 시도한 것도 그런 차별화 중 하나다. 젊은 여성층 공략이라는 숨은 의도가 있다. 그러나 만화영화 같은 영상은 아무래도 CG보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 만큼 캐릭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야 했다. 프로젝트 NT의 캐릭터들은 플레이어와 눈을 맞추며, 시선을 바꿀 때 몸의 뼈도 미세하게 움직인다. 실제 인체를 연구한 결과를 반영했다.
‘폐인 안 만드는 게임’이 목표
대작 온라인게임은 게임 개발자들의 로망이다.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많게는 수십만 명의 사용자들이 게임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혁명을 일으키며 결혼을 하면서 역사를 만든다. 한국은 높은 초고속인터넷 보급률과 PC방 문화에 힘입어 이 장르를 개척하고 10년 가까이 종주국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그 열기가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식어 프로젝트 NT를 포함해 현재 개발되고 있는 온라인게임은 4, 5편에 불과하다. 각종 게임 관련 규제나 모바일게임의 열풍 같은 외부 요소도 있지만 게임업계 내부의 문제 탓이기도 하다.
“온라인게임을 안 하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어요. 너무 어렵다, 중독될까 봐 두렵다, 전투가 반복 노동처럼 여겨진다 같은 답을 들으며 어떤 게임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정 대표는 프로젝트 NT가 기존 온라인게임과는 ‘게임성’이 다른 작품이라고 말했다. 엇비슷한 온라인게임이 과다 경쟁을 벌이면서 수익성이 떨어지고, 게임회사들은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로 돌파하려 하고, 게임 제작비가 높아질수록 모험을 피하게 돼 콘텐츠는 점점 더 비슷해지는 악순환을 보며 초심으로 되돌아갔다는 설명이었다.
시선 곱지 않고 처우 열악하지만
프로젝트 NT의 개발기간은 4년, 개발인력은 약 60명이다. ‘밤샘도 자주 하느냐’는 질문에 개발자들은 “다른 회사에 비하면 거의 없지만, 게임 개발자와 밤샘은 원래 친구 같은 관계”라고 대답했다. 박성철 프로그램팀장은 “경력 구직자들이 면접 때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월급은 밀리지 않느냐’와 ‘밤샘은 얼마나 자주 하느냐’일 정도로 영세한 업체들이 많다”고 말했다. 게임 개발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국내 게임업계도 영화판이나 만화판처럼, 그 일이 너무 좋아 미치겠다는 사람들이 꾸려가는 바닥이다.
방과 후에, 또는 퇴근하고 자기 전까지만 흥겹게 즐길 수 있는 게임, 폭력 성향을 분출시키기보다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보는 느낌을 주겠다는 게임, 폐인을 만들지 않는 온라인게임이 되겠다는 프로젝트 NT의 실험은 성공할까. 온라인게임 아이템 거래(이른바 ‘현질’)에 월 100만 원 이상 쓴다는 회사원 이모 씨는 “온라인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래픽이나 전투의 쾌감보다는 얼마나 이용자의 과시욕을 채워주느냐 하는 점”이라며 “프로젝트 NT가 이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 ‘현질’이 좀먹는 게임세계 ▼
▽현질=현금을 주고 온라인게임 내 아이템을 사거나 다른 사람에게 캐릭터 육성을 맡기는 일. 대부분의 온라인게임에서 일반화돼 있으며, 거래가가 수천만 원에 이르는 아이템도 있다. 게임 아이템을 모아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대 청소년이나 자동 프로그램, 중국인을 이용해 기업형으로 아이템 판매업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왜 현질을 하나=정상적으로 캐릭터를 키우고 아이템을 얻는 것으로는 제대로 온라인게임을 즐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현질을 하게 된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게임 아이템과 레벨이 높은 캐릭터라는 희소자원을 두고 시간이 많은 사람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게임 속 세계가 복잡해지고 현실을 닮아가면서 생긴 일이다.
▽게임회사는 현질을 어떻게 생각하나=복잡한 심정이다. 게임이 현질 위주가 되면 사용자들이 흥미를 잃으므로 신경을 쓰고 관리해야 하지만 ‘게임 속 시장경제’ 자체는 이미 게임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됐다. 게임회사 자신이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아이템(캐시템)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아예 공식 아이템 경매장을 마련해 거기서 수수료 수입을 올리는 곳도 있다.
▽거액을 들이고 반복 노동을 하면서 온라인게임을 하는 심리는=그만큼 온라인게임이 중독성이 있다는 답은 절반만 옳다. 나머지 절반의 답변은 ‘그만큼 현실이 재미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당수 게이머에게 게임 속 세상은 공부를 못하고 ‘백’이 없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비교적 노력한 만큼 보상을 얻을 수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는 곳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