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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해제 MB5년]정두언 실종사건(上)

입력 | 2013-04-13 03:00:00

“국세청에 내 자료 왜 달라고 해?” MB는 鄭을 다그쳤다




대선이 끝나고 이듬해인 2008년 1월 1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보좌역인 정두언 의원이 한복을 입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내식당에서 떡국을 받아 가고 있다. 그때만 해도 누구나 정두언이 MB 정권에서 승승장구할 것으로 내다봤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동아일보DB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대선 이듬해인 2008년 1월 초 어느 날, 이명박 대통령(MB)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당선인 집무실로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을 불렀다.

“얼마 전 인사동에 밥 먹으러 갔는데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인수위는 다 정두언 사람이래’라고 하더라….”

정두언은 MB에게 별 해명은 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몸가짐을 더 조심하라’는 뜻이겠거니 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 보좌역으로 새 정부 인선 작업을 총괄하던 정두언은 명실공히 최고 실세였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함께했고, 선거 기획을 주도한 정두언에 대한 MB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MB는 대선 직후 그런 정두언을 불러 “인수위 인선안을 짜라”고 지시한다.

정두언은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 곽승준 고려대 교수, 김원용 이화여대 교수, 그리고 박영준 MB선대위 네트워크팀장 등으로 인수위 인선팀을 꾸렸다. 훗날 지식경제부 2차관 등을 지내며 ‘왕 차관’으로 불린 박영준은 이때만 해도 정두언 팀의 ‘실무자’에 불과했다. 정두언은 밤낮으로 인선 작업을 한 끝에 박영준을 데리고 2007년 12월 말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내 미팅룸에서 MB에게 인수위원 명단 24명을 보고했다. MB는 극비 보고를 받을 때마다 이 미팅룸을 자주 이용했다. 24명 중 2명을 제외하곤 정두언 안이 그대로 통과됐다. 자연히 인수위 전문위원, 자문위원도 정두언의 손을 거쳤다.

인수위가 발족한 직후인 2008년 1월 첫째 주부터 여권에선 “인수위가 정두언 판이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정두언이 고교(경기고)-대학(서울대) 동문들을 대거 인수위에 심었다”며 특정인의 이름도 거론됐다. 인수위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던 조원동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보(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가 대표적이었다. 두 사람은 1975년 경기고를 졸업한 동기동창. 정두언이 “원동아”라고 부르는 친구였다. MB는 이런 말이 자신의 귀에도 들리자 정두언을 불러 시중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정두언은 주변에 “인재를 쓰려다 보니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 많은 거지 나랑 친한 사람을 쓴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인 조원동은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장 등과 함께 관가에서 ‘천재’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정두언은 MB에게 ‘한 소리’를 듣고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와대 인선과 새 정부 조각 작업을 하던 정두언은 함께 작업하던 팀원들을 불렀다.

“우리끼리 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인사위원회 비슷한 구조를 만들어야겠다.”

다들 수긍하자 정두언은 이를 MB에게 보고했고 인선팀은 MB를 위원장 격으로 하는 위원회 형식으로 재편된다. 전문가 그룹에서 몇 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박영준도 위원회의 정식 멤버가 됐다. 정두언의 결정이 한몫했다.

역시 인수위 발족 직후였다. 정두언은 곽승준과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점심을 하려다 박영준의 전화를 받았다. 박영준도 식사 자리에 합석했다.

박영준=“형님, 대선에서 제가 이끌던 선진국민연대 사람들 고생 많았는데 인선에서 좀 고려해 주시죠.”

정두언=“음, 그러면 그냥 네가 와서 직접 (인선) 해.”

이렇게 박영준까지 합류한 위원회에선 인선을 놓고 제법 난상토론도 벌어졌다. MB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원세훈 등 주요 인선 후보군에 대한 거침없는 토론도 이뤄졌다. 어느 날 MB가 “원세훈 그 사람 쓸 만하지 않나”고 물었더니 한 위원은 “그 양반 밥도 혼자 먹어서 주변에서 ‘원 따로’라고 부르던데요”라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선 작업이 한창이던 1월 중순, 정두언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대선 당시 국세청이 ‘도곡동 땅 의혹’ 등 MB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고 본 정두언은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에게 문제의 자료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국세청이 그 자료를 갖고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상률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료를 넘기지 않았다. 하루는 남산의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한 청장을 직접 만나 채근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료는 받지 못했다. 정두언이 한상률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자료 좀 달라는데 무슨 이유가 그리 많습니까?”

정두언은 통화 후 전화기를 집어던지듯 세게 내려놨다. 튕겨져 나간 수화기가 줄에 매달린 채 사무실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고 얼마 뒤. MB가 정두언을 불렀다.

MB=“국세청에 내 관련 자료를 달라고 했다면서? 왜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녀!”

정두언=“….”

얼마 전 ‘인사동 민심’을 전할 때와는 달랐다. 노기(怒氣) 서린 목소리였다. 대선 기간 내내 도곡동 땅 의혹에 시달렸던 MB였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한 MB 앞에서 정두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두언은 한상률과의 통화 사실이 MB에게 전해진 과정을 은밀히 알아봤다. 정두언은 결국 한상률이 어떤 경로로든 MB에게 보고했을 거라고 여겼다. 정두언 주변에선 서서히 세를 키우던 박영준이 이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MB에게 한두 차례 더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은 정두언은 결국 1월 중순경 MB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계속 인사에 관여하다간 아무래도 (네가) 다칠 것 같다.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인선에서 손을 떼라.”

2002년 7월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인연을 맺은 후 MB 대통령 만들기에 다걸기(올인)했던 정두언은 ‘멘붕’에 빠졌다. MB 주변에선 대선 직후 시작해 이듬해 1월 중순 소낙비에 벚꽃 지듯 끝나 버린 정두언의 이 전성기를 ‘보름 천하’로 부르기도 한다.

정두언에게 ‘인선 작업 중단’을 통보한 MB는 대신 자신의 스피치라이터였던 류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게 인사위원회를 새로 꾸리라고 지시한다. 류우익은 대선 직후 정두언이 짠 인수위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후 “내 소임은 끝났다”며 세계지리학회 참석차 홀연히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가 숙부의 부고를 듣고 1월 초 입국해 있었다. 정두언에게서 인선 자료를 건네받은 류우익은 이윤호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장, 김병국 고려대 교수, 서대원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 주호영 당선인대변인, 행정학 교수 A 씨(현 고위 공직자), 그리고 박영준으로 구성된 2차 인사위를 꾸렸다. 정두언이 이끌었던 인사위 멤버 중 박영준만 살아남은 것이다. 초기부터 인선에 참여했던 박영준은 삽시간에 ‘류우익 인사위’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정두언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한상률 사건’이 MB에게 알려지게 된 배후로 박영준을 본격적으로 의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영준을 보좌관으로 오래 데리고 있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이 자신을 견제하는 것으로도 생각했다. 당시 ‘정두언 인사위’에 있던 B 씨의 주장. “박영준이 ‘정두언과 한상률 사건’을 MB에게 알렸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정두언이 나이브(순진)했던 것은 분명하다. 박영준이 끝까지 자기를 ‘형님’으로 모실 걸로 착각했던 것 아닌가.”

MB 정부의 조각을 주도하던 정두언은 하루아침에 인사위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백수’로 그냥 호락호락 물러날 정두언은 아니었다. (다음 주 ‘정두언 실종사건(下)’편에 계속됩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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