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 논설위원
“통화량이 늘면 처음엔 이자율이 내린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기대인플레를 상쇄하기 위해 명목이자율이 높아진다. 이 때문에 브라질 칠레 이스라엘 한국과 같이 화폐수량과 물가의 급격한 상승을 경험한 나라에서는 이자율이 높다.”
세상에, 대(大)경제학자가 한국을 중앙은행 독립이 제대로 안 돼 돈을 많이 찍어 인플레율과 이자율이 높은 대표적인 나라로 지목한 것이다. 21년 전 일이다. 3% 안팎의 물가, 기준금리 연 2.75%인 지금과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김중수 한은 총재는 ‘독립론자’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2010년 총재로 지명된 직후 “한은도 큰 틀에서 정부다”고 말해 ‘저래서야 한은 독립을 지키겠나’ 하는 소리를 들었다. 올해 2월 발표한 논문에서는 “(한은의) 독립성이 고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정책과 조화를 배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고 했다. 곧이어 국회에서는 ‘물가안정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라는 전제를 붙이기는 했지만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가 왜 이러는 걸까.
우선 경기 전망이 정부와 좀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위기가 마무리 국면인 데다 우리 경기도 미약하나마 회복세여서 좀더 지켜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실질금리(명목금리-물가상승률)가 ‘0% 이하’인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더 내리기가 망설여진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금융시장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 마땅한 투자처를 못 찾아 떠도는 단기부동자금이 670조 원,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도 124조 원에 이른다. 돈이 넘치지만 투자나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유동성 함정’ 상태다. 이런 때는 유동성 추가 공급이 아니라 재정이나 총액한도대출을 통해 총지출을 ‘직접 해줘야’ 효과가 있다는 게 한은의 생각이다.
전기 대비 성장률이 7분기 연속 0%대인 상황에서 ‘추경을 하고 부동산을 자극해서라도 경기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파이팅은 좋다. 반면 경기 및 금융시장에 대한 한은의 판단도 존중받아야 한다. 현재로서는 누가 옳은지 단언하기 힘들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앙은행의 역할이 물가안정에서 디플레와의 싸움으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매우 부정확한 단순화다. “중앙은행의 임무에 물가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의 안정이 추가됐다. 이를 위해 금융업계에 대한 정보접근권을 중앙은행에 줘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 추세를 올바로 전하는 문장이다.
정권이 바뀌면 한은 총재가 사표를 내던 때가 있었다. 이 관행은 이명박 정부가 이성태 전 총재의 임기를 존중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끊어졌다. 그만큼 세상이 더 성숙해진 것이다. 프리드먼이 한국을 낮춰 묘사한 것은 한은 독립이 안 되고 금융은 산업정책의 시녀 노릇을 하던 ‘관치의 시대’였다. 20여 년 동안 많이 달라졌다. 이제 제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을 가질 때가 됐다. 그게 국격(國格)에 맞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