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변호사
이달 9일 국회 정무위는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납품 단가 협의권을 주는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과 연봉 5억 원 이상의 상장사 등기이사 보수 명세를 공개하기로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며 대형마트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된 이후 예견된 수순이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바로 대처가 말한 ‘사회주의적 병폐’가 아닌가.
현재 우리나라는 실업자가 아닌, 구직 자체를 포기한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고 광의의 국가채무가 1273조 원으로 사상 처음 국내총생산을 추월했다. 이런 상황은 영국병을 앓던 시절의 영국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부와 국회의 대처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퍼주기식 복지에 매달리는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런 ‘사회주의적 병폐’를 앓게 됐을까. 불과 5, 6년 전 낯설고 급진적이던 무상복지 정책들이, 어느새 대중의 당연한 권리가 되어 있다. 포퓰리즘은 이처럼 무섭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면 “아이들 밥 한 끼 주는 게 그렇게 아깝냐”는 식으로 매도당하고, 무상보육을 경계하면 역시 비난받는다. 퍼주고 나눠주고 탕감해주면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기업이고 그 일자리가 곧 복지임은 모른다. 오히려 가진 자를 공격하고 기업을 미워하면 내가 잘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물론 부자를 미워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내 월급은 적은데 등기이사의 연봉이 5억 원을 넘는다면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부자에 대한 증오를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건 다른 문제다.
행운으로 부자가 되었다 해서 나눠 갖지 않는 그를 타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더욱이 남다른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를 미워할 게 아니라 나는 왜 그러지 못했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규제를 통해 대기업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은 정책적으로 허물어야 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성장의 발판이 되고 대기업과 상생구조를 이루어야 우리 경제의 잠재력이 더욱 튼튼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최근의 움직임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기업을 때려 하향 평준화를 도모하는 것 같다. 더구나 정무위는 현재 중소기업 기술을 탈취한 경우에만 적용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부당한 단가 인하와 발주 취소, 그리고 반품에까지 확대 적용하겠다고 한다. 그 부당함이란 것도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이 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공정위가 서슬 퍼렇게 군림하게 됐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륙법체계인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 영미법의 제도를 무리하게 도입하면서까지 기업 때리기에만 몰두한 결과다.
경제 주체 간의 균형을 도모할 필요성은 공감한다. 그러나 헌법은 제119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는 기업의 자유와 시장경제체제를 천명한 우리 경제질서의 원칙 조항이다. 그래서 세금을 더 거둬 복지를 베풀더라도 이 틀을 깨지 않기 위해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뒷날 누군가가 지금의 사회를 두고 ‘사회주의적 병폐’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김지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