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 ★★★★☆
윌리엄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는 2개의 격리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이질적인 춤을 동시에 보여준다. 수십개의 테이블로 뒤덮인 ‘카오스의 공간’에서 무용수 개개인의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춤사위(위 사진)가 펼쳐지는 동안 오르간과 무용 매트가 펼쳐진 ‘코스모스의 공간’에선 무용수들이 서로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 보다 질서정연한 춤이 펼쳐진다. 성남아트센터 제공
윌리엄 포사이스의 춤도 마찬가지다. 그가 요즘 안무한 복잡다단하고 난해한 춤만 보고 그를 판단해선 안 된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다 열일곱 살에 발레에 입문했다. 뛰어난 재능으로 197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발레리노로 발탁된 뒤 놀라운 안무 솜씨로 4년 만에 상임안무가가 됐고 1984년부터 근 20년간 프랑크푸르트 발레단 예술감독이 됐다. 고전발레와 모던발레의 정통 코스를 거치고 난 뒤 비로소 정통발레를 해체하고 이를 현대무용으로 재구성한 ‘무용의 큐비즘’에 도전했다는 소리다.
10∼14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헤테로토피아’는 그런 포사이스의 최근 대표작 중 하나라는 점에서 공연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20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대작임에도 매회 관객 수를 300명으로 제한한 이 작품은 티켓 가격이 9만 원이나 됐지만 전석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입장한 관객의 왼편 공간은 듬성듬성 빈 공간을 제외하곤 테이블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그 위엔 무작위로 조합된 알파벳 단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무용수들은 그 테이블 위 또는 아래에서 개별적으로 원시적인 몸짓과 괴성을 질러댄다. 반대로 오른편 공간은 오르간과 매트가 깔려 있고 왼편 공간의 음향이 마이크로 전달된다. 그 음향에 맞춰 이뤄지는 오른편 공간의 춤 역시 정형화된 춤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어우러진 좀더 고난도의 춤이 펼쳐진다.
어느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관람하려다 보면 작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양쪽을 계속 넘나들다 보면 혜안이 생긴다. 왼쪽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자연=무의식=광기’의 공간이다. 반면 오른쪽은 그것을 나름 인간적 잣대로 포착한 ‘문명=의식=질서’의 공간이다. 전자가 카오스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코스모스의 공간이다.
이는 카오스 공간의 음향에 맞춰 남녀 무용수에게 우스꽝스러운 춤을 지도하던 코스모스 공간의 양복쟁이 남성을 통해 분명히 형상화된다. 그는 카오스의 공간으로 이동한 뒤에는 무질서하게 배치된 알파벳의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마이크에 담아내며 일정한 패턴을 읽어내려 한다.
이 작품은 이런 이분법적 구조를 담아내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번역되는 과정의 우스꽝스러운 자의성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그것은 통제 불가의 자연 대 질서정연한 문명, 섬뜩한 무의식 대 합리적 의식, 위험한 광기 대 안전한 질서의 이분법적 폭력성을 맹비판한 미셸 푸코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춤에 대한 자연스러운 본성을 인위적 틀로 묶어두려는 고전발레에 대한 야유로도 이어진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