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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낡은 유모차와 할머니

입력 | 2013-04-17 03:00:00


이 골목의 아침은 자기 말만 늘어놓고 슬그머니 사라진 흔적들이 나뒹굽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뱉어낸 구겨진 말들, 조합해보려고도 했지요.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 정말이지 지나가고 싶지 않은, 사라지기도 뭐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 어디 감당이나 하겠는지요.

담뱃갑을 굳이 구겨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을 슬쩍 감으면 이 허접한 곳은 그대가 살던 곳, 이미 사라진 길을 낡은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지나가곤 합니다. 어떤 예쁜 당나귀가 타고 다녔는지 할머니는 가만히 밀고 와서는 전봇대 표시판에 끼인, 배수구에 반쯤 걸린, 불법 주차된 차의 윈도 블러시에 걸어놓은 허접한 것들을 수거해가곤 합니다.

일용할 양식.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은 정말이지 일용할 양식이겠지요. 골목은 다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린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귀걸이를 한 여자와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로 흘러내리는 남자가 서로 바라보듯 허허롭기만 한데요. 저승 같기도 하고 이승 같기도 하고 산처럼 멈춰 있기도 한 이 뒤숭숭한 골목을 어떻게 지나가야 잘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당치도 않은 이 한평생.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이 나뒹군다니 주택가가 아니라 유흥가 골목일 테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참인지 이른 출근길인지, 아니면 밤새워 술 마시고 막 술집을 나선 참인지, 화자는 그 길을 지나가고 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간밤에 내뱉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처럼, 텅 비고 허접하고 구겨진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골목의 아침. 피로가 몰려오는구나. 어쩌면 이다지도 척박하고 쓸쓸한가! 이런 것이 내 인생의 길목이란 말인가! 당최 감당이 안 된다고 토로하던 화자는 그 길에서 이따금 마주치곤 하는, 폐지 모으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아,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 미치도록 가벼운 할머니의 양식! 할머니의 슬픈 현실에 이르러 시인은 구질구질하게 보이지 않도록 상상력을 발휘한다.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예쁜 당나귀를 태워준다. 이런 섬세하고 고운 마음이 우리를 힘나게 한다! 과장 없이 단아한 문장과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는, 도심 골목의 가당찮은 허허로움 와중에.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