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국제부 기자
이후 한국 영화를 수백 편 봤지만 지금 돌아봐도 쉬리는 대단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처럼 핏줄과 죽음이 공존하는 남북관계를 잘 담아냈다. 이는 이후 북한을 소재로 삼아 성공한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코드이기도 하다.
쉬리를 보면서 가장 전율했던 순간은 특수8군단 소좌 박무영으로 열연한 최민식이 국정원 요원 한석규에게 침을 튀기며 울부짖을 때였다.
놀랐다. 치즈에 콜라를 먹고 사는 작가가 쓴 대본 같지 않고, 햄버거를 먹고 사는 배우가 하는 연기 같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기자로 산 지만 햇수로 12년째. 북한과 탈북자들을 취재하다 보니 늘 애통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에 잠겨 있다. 작년 봄에도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되는 탈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한 달 넘게 노력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지금 북한은 12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탈북자도 여전히 팔려가고 잡혀가고 죽어가고 있다. 내 마음에는 10년 넘게 묵힌 분노가 꽉 차있다. 연기엔 소질이 없지만 박무영의 울부짖음만큼은 어느 배우보다도 더 잘할 것 같다. 북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백 번, 천 번도 더 넘게 부르짖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아닌 현실에 박무영이 존재한다면 그는 서울에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가 정작 멱살을 움켜쥐고 성토해야 할 대상은 모두 평양에 있기 때문이다.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