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5·16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 지키기 위한 혁명”
1961년 5월 16일 아침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진주한 혁명군 소속 공수부대. 전국을 일시에 장악한 군사혁명위원회가 각종 포고령을 쏟아내자 세상이 숨을 죽였다. 동아일보DB
‘미명을 기해 난데없이 일어난 요란스러운 총성에 전 시민은 4·19를 연상할 정도로 불안과 공포에 빠졌었다. 이것이 곧 군의 ‘쿠데타’에 의한 장면 정권 타도의 신호였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4·19 학생혁명의 산물인 장면 정권은 집권 아홉 달을 넘도록 그 빈곤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역량이 이승만 시대에 못지않게 부패성을 내포(內包), 국민의 혐기(嫌忌·싫어서 꺼림)와 반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그때그때 민의(民意)의 동향을 살피면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초비상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만일의 경우를 경고해 오지 않았던가.’
사설은 이어 ‘사월혁명 그때처럼 인명의 희생자를 냈더라면 어찌 됐을까, 무엇보다도 피를 보지 않은 그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안도하면서 ‘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중 (반공체제를 정비하고 구악을 일소하며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첫째 셋째 넷째 조목에 있어서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쿠데타’에 기대를 표시한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 군사혁명이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이어 ‘(비록) 5·16 혁명이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며 혁명세력에 이렇게 주문한다.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5·16 혁명은 4·19 혁명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5·16 이후 발족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면 내각이 총사퇴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됐다. 7월 3일 위원회 부의장을 맡았던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
그렇다면, 5·16에 대한 학생운동권의 생각은 어땠을까. 성균관대 학생운동권을 이끌던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75)의 말을 들어보면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당시 민심과 비슷했다. 그의 말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당일부터 포고령을 쏟아내면서 정국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는다. 포고령에는 출국 금지, 공항 항만 폐쇄, 집회 금지, 언론 검열, 직장 이탈 금지, 통금 시간 연장, 영장 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조항 등이 있었다. 예금 인출 사태를 막기 위해 금융거래도 동결됐다가 1회에 10만 환, 한 달에 50만 환으로 제한됐으며 물가동결은 물론이고 매점 매석자를 극형에 처하겠다는 조항도 있었다. 구호 학술 종교단체와 기타 최고회의에서 허가하는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도 금지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서울시장을 포함해 각 시도지사, 각 도 경찰국장 등 행정 및 치안 요직들도 군인들로 채워졌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는 혁명공약에 따라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다. 5월 22일까지 전국에서 약 2000명이 용공분자 혐의로 붙잡혔다. 7월 3일엔 반공법이 공포됐다.
세상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도 모두 숨을 죽인 듯했다. 검거를 피하기 위해 학생 운동가들은 학교를 떠나 순식간에 도피했다. 김지하도 서울을 떠났다.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중정은 이후 정부 위에 군림하는 비밀정부로 군림하게 된다.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소개된 3대 중정부장 김형욱의 증언이다.
정치활동도 얼어붙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일명 정정법·政淨法)을 만들어 정치인 4374명의 발을 묶었다. 법안이 통과된 직후인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하야가 최고회의에서 통과된 3월 24일,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채널A 영상]故 장준하 선생 유골검사…사망원인 아직도 ‘미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