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처 前 영국총리 장례식 거행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장례식이 거행된 17일 잔뜩 찌푸린 런던의 하늘에서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대처 전 총리는 사망한 지 9일 만에 1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데니스 대처 경의 곁으로 갔다.
이 기간에 영국은 대처가 남긴 유산과 공과(功過)를 놓고 극명하게 양분됐다. 친(親)대처파와 반(反)대처파는 “공산주의에 맞서고 영국병을 치유한 위대한 총리” “자본가의 배만 불리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최악의 지도자”라고 각각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장례식을 끝으로 영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 긴장, 애도, 기쁨의 복잡한 공존
세인트폴 성당 앞 루드게이트힐 거리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대처의 마지막 길을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모였다. 수십 명은 성당 앞에서 침낭으로 밤을 새웠다.
자신이 32년간 봉사했던 국회의사당의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대처의 관은 이날 오전 10시 국기 유니언잭에 싸여 영구차에 실린 뒤 정치 중심지인 화이트홀 대로를 따라 이동했다. 이어 트래펄가 광장을 거쳐 스트랜드 대로를 달려 10분 만에 세인트클레멘트데인스 교회에 도착했다.
영구차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유니언잭을 흔드는 시민의 모습이 보였다. 15분마다 울리는 국회의사당 시계탑 빅벤은 애도의 뜻으로 이날 오전 10시부터 추도 예배가 끝나는 낮 12시까지 2시간 동안 타종을 멈췄다.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국장(國葬·1965년)에 이어 48년 만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총리 장례식에 참석한 것도 처칠 전 총리 이후 처음이다.
대처의 관은 근위기병대의 말이 이끄는 포차(砲車)로 옮겨졌다. 오전 10시 35분 교회를 출발한 장엄한 운구 행렬이 스트랜드 대로와 플리트 거리를 지나갈 때 시민들은 끊임없이 박수를 보냈다. 일부 반대처주의자의 집회가 있었지만 과격한 시위는 없었다. 운구 행렬 주변 거리는 오전 7시 30분부터 모두 폐쇄됐고 테러 등에 대비해 4000여 명의 경찰과 2000여 명의 군인이 동원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 11명의 총리와 17명의 외교장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등 170개국에서 온 조문단 2300여 명은 장례식 한 시간 전인 오전 10시까지 세인트폴 성당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20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부부에 이어 대처의 쌍둥이 자녀 마크와 캐럴, 손자 손녀가 입장했고 마지막으로 10시 45분 영국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 필립 공이 성당에 도착했다.
운구 행렬은 10시 55분 세인트폴 성당 앞에 도착했다. 대처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되는 포클랜드 전쟁에 참여했던 전쟁 용사 등 10명의 군인은 성당 앞 계단에 좌우로 늘어선 근위대와 예비역 군인들 사이로 천천히 관을 옮겼다. 장례식을 관통한 테마는 대처의 전쟁으로 불리는 ‘포클랜드 승전’이었다.
장례식은 영국의 대표 작곡가인 에드워드 엘가와 랠프 본윌리엄스의 장송곡이 연주되는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식순 안내장의 첫 페이지에는 대처가 생전에 좋아했던 시인 T S 엘리엇의 대표작 ‘작은 현기증(Little Gidding·1943년)’, 마지막 페이지에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영혼 불멸의 노래(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가 인쇄됐다.
1시간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처의 관이 성당을 나오자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여왕은 대처의 관이 성당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봤다. 화장된 대처의 유골은 2003년 사망한 남편의 묘소가 있는 왕립 첼시 안식원에 나란히 묻혔다.
런던=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