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은 사람들에게 보리 한 말씩이면 선거 이긴다”
1962년 6월 9일 화폐개혁이 전격 실시되자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동아일보DB
“중학교 1학년 때인 열세 살에 목포를 떠나 5·16 나고 처음으로 갔으니 10여 년 만에 가본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놀던 영산강가라든가 황톳길을 혼자 돌아다녔다. 대(竹)밭도 돌아다니고 귀신이 나온다는 벽돌 섬이라는 이상한 섬도 가보고 바닷가도 며칠씩 서성거렸다…. 내 문학에서 뿌리를 더듬는다고 할 때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이 고향 전라남도 목포이다. 목포에서도 변두리 달동네이지만 반(半)은 도시고 반은 농촌이고, 반은 어촌이고,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인간과 인간, 이웃끼리의 관계는 정답고 친밀하고.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건달 민중이랄까?(웃음) 산업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허덕허덕하면서도 정(情)에 끌려 사는 사람들, 바로 이런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당시 스물한 살 푸르디푸른 청춘이었건만 내면은 결핍, 외로움, 절망으로 가득했다. 제정신으로 살기가 힘들어 술에 기대는 날이 많았다. 이런 생활은 그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었으니 훗날 그를 괴롭힌 폐결핵이었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과 의욕만 앞서다 보니 시행착오와 졸속이 많았다. 박 의장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3개월 뒤인 1962년 6월 9일 단행한 화폐개혁이 대표적이었다. 이것은 장롱 밑에 잠자고 있는 음성 자금을 끌어내 투자재원으로 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격적인 화폐개혁으로 지난 9년여 동안 사용되던 ‘환’이 ‘원’으로 바뀌었고 10환은 1원으로 평가 절하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돈이 나오질 않았다. 국민들이 돈을 내놓고 싶어도 내놓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화폐개혁 같은 비상조치를 한마디 상의 없이 밀어붙였다”며 “즉각 철회하지 않으면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화폐개혁은 엄청난 부작용만 초래하고 한 달여를 버티다가 동결예금을 해제하는 식으로 전면 백지화된다. ‘혁명 정부’의 첫 번째 대작(代作)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국내에서 돈을 마련하는 일이 무망해지자 이제 돈 구할 곳은 외국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한국에 돈을 빌려줄 나라는 없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주는 나라에 따로 차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일본도 “국교가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주느냐”고 했다. 결국 서독으로부터 3000만 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당시 이야기는 본보 4월 1일자 1, 3면에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
화폐개혁 실패라는 쓴잔을 맛본 군사정권이 민간 정부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정권을 민간에 넘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1963년 8월 13일 박정희 의장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는 것으로 그해 10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한다. 군정 종식을 기대해온 정치인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충격에 빠졌다.
백성들은 무엇보다 민생고에 절규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 불신이 극에 달했다.
‘쌀값이 오르니 만물(萬物)이 비례해서 뛴다. 옛날에는 50환짜리 칼국수가 있었고 100환짜리 해장국이면 먹을 만했는데…‘못살겠다 갈아보자’ 구호가 ‘죽겠으니 살려 달라’는 아우성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끼를 밀가루 죽으로 연명하고 밀가루마저 없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무슨 선거니 정당이니 나팔을 부느냐 말이다…군부정치는 그렇다 치고 야당 측에나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더니만 아직도 멀었다. 갈기갈기 찢기어서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별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폐개혁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신화(新貨·새 돈) 100원짜리가 구화(舊貨·헌 돈) 100환짜리 가치와 큰 차이가 없으니 결국 혁명 정부의 화폐개혁은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절하한 것밖에 안 된다.’
‘이제는 좀 살게 되나 보다 학(鶴) 모가지처럼 길고 애처롭게 고대했던 국민 앞에 혁명정부의 참신하고 양심 있는 책임행정이 가져다준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도 썩어빠진 구 정치인보다는 낫겠지 이런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한번도 정부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복 없는 우민의 애소(哀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엔) “진작 군에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국회의원이나 대사라도 한번 해보지” 하는 뼈 있는 농담이 오간다…혁명 초기 행정력의 위력과 서슬은 대단했다. “잘한다” “시원하다”는 찬사가 빗발쳤다. 그러나 얼마 후 시정(市井)에는 새로운 여론이 조성되어 갔다. “액수가 (전보다) 더 커졌다네, 관청 주변의 이권거래 흥정에는 액수만 크면 승부는 전보다 빠르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번져갔다. (이런 말도 나돈다) 나도 혁명바람이나 탈걸∼동네마다 고기 근이나 사 나르고 ‘텔레비 안테나’에 화초(花草)그릇이 늘어나는 신흥귀족의 집들이 보인다네.”’
박 의장이 약속했던 민정 이양에 대해서는 의외로 의견이 엇갈렸다.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일부 국민은 무조건 연내 민정이양이란 (군부의) 약속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또 일부 국민은 대안 없는 민정이양을 불안해하고 있다…박 의장에 대한 대중의 민심은 역시 빵 문제가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배불리 먹여만 준다면 박 의장은 민족의 태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상인의 말이다. “굶은 사람들에게 보리 한 말씩만 나누어 주어도 선거는 이기는 거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