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인이란 반드시 공무원의 신분을 가진 자만이 아니라 업무 자체가 불가피하게 공공 봉사적 성격을 띠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언론인, 작가 등 일반 공중(公衆)에게, 말하자면 규범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두루 칭하는 다소 편의적인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비록 공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공적인 활동과 사적 생활의 영역은 일단 분리해 관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자유(제17조)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행복추구권 보장(제10조)의 차원에서 보아도 이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리라고 할 수가 있다.
또 공인이라고 할지라도 법관이나 행정 관료처럼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장막 뒤에서 주로 일하는 공직자들과 정치인이나 작가와 같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보여줘야만 하는 장막 앞에 나선 사람들은 그 처지가 반드시 같을 수가 없다. 앞의 이를테면 ‘숨은 공인’들의 사적 영역은 비교적 잘 보호될 수가 있지만, 뒤의 말하자면 ‘드러낸 공인’들은 평소 일반대중과의 교류나 소통이 불가피하므로 그 사적 생활이나 영역의 보호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민들의 보편적 인식을 기준으로 본다면 현직의 공인들뿐만 아니라 퇴직한 전직 공인들의 사적 생활의 영역도 특혜니 전관예우니 하는 사회적 부조리가 잔존하는 한 일정한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낙향한 시골집에서 텃밭이나 가꾸며 유유자적하는 전직관료나, 붓을 꺾고 바닷바람을 쐬며 한거(閑居)하는 유명작가의 또 다른 모습이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 청신한 느낌 같은 것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쯤에서 우리는 공인들의 사적 영역을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바꾸어 볼 필요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된다. 이를테면 돌아가신 작가 박완서 선생을 좋아하는 분들은 선생이 어느 해 겪으셨다는 의사가 될 아드님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한 참척(慘慽)의 고통을 글이나 소문을 통해 알게 된 이후 오히려 선생에 대한 인간적 친밀감과 독자로서의 외경심이 더 높아졌다는 측면을 상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최근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바른 검찰권 행사와 국민적 신뢰회복의 기대를 받고 있는 검사 채동욱이 수년 전 오랫동안 아프던 20대 딸을 잃었을 때 분향소를 찾거나 그의 인사편지를 받았던 적지 않은 동료, 지인과 법조 관련자들이 그동안 그가 억제했을 눈물과 담백한 몸가짐에 대하여 작은 감동을 느꼈을 가능성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공인의 사적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밝고 따뜻한 것이라면, 적어도 특별히 메마르거나 경우 없는 성질이 아닌 이상 일반 공중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까지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에 말한 ‘숨은 공인’들의 경우에는 그런 편이 우리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고, ‘드러낸 공인’들이라면 대중적 소통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