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무너지다니… 20년 혁명의 꿈도 무너져내렸다
운동권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통일. 신성장동력으로서의 통일을 설파하는 모습에서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수원=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87년 두 번째 투옥돼 이 단어를 접한 순간 혁명을 꿈꿨던 그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 주동자로 수감된 뒤 신념 하나로 버티던 그였다. 옛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이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잡지에서 접한 뒤부터 “사회주의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 혁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노동자 조직을 규합해 결정적 시기에 정권을 장악하는 대한민국의 전복을 꿈꿨다. “내 이상은 노동자와 빈민, 농민, 소상공인, 지식인들이 합쳐서 재벌과 외세, 군부를 타도하는 인민민주주의였어요. 엄밀히 말하면 좌익이었죠.”
심재권의 연설과 김근태의 공활 권유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문수 경기도지사(62)는 대학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도 지성계를 풍미한 월간지 ‘사상계’를 읽고 토론을 즐겼던 그에게 첫 중간고사 시험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때보다 더 형편없는 시험이었죠. 단답형으로 괄호 안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거 하려고 대학에 들어왔나 싶더군요.”
김문수가 신입생 때 학교 공부를 그만두고 운동권에 발을 들인 결정적 계기는 1년 선배인 심재권의 연설이었다. 현재는 현역 재선 의원인 심재권은 김문수가 강의실에서 수업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여러분은 출세하려고 대학에 들어 왔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나라의 현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우리가 반드시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사명감으로 하늘의 별처럼 높은 이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김문수는 그 순간 ‘필’이 팍 꽂혔다고 한다. 지식인들이 민족주의 관점에서 빈민과 노동자, 농민 등 약자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교내 운동권 동아리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했고, 교련 반대 시위와 반일 시위를 주도하는 등 시위 대열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8일 경기 수원시 도지사 공관에서 만난 김 지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노동현장에도 뛰어들게 된다. 대학생 신분을 속인 첫 위장취업이었다. 당시에는 ‘농활’(농촌활동)은 보편화돼 있었어도 ‘공활’(공장활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그를 구로공단 미싱 공장에 취직시킨 사람은 바로 고 김근태 전 의원. 65학번인 김근태는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제적당해 강제징집됐다가 복학을 한 상태였다. “김근태 선배는 당시 데모를 위주로 하는 사람이었어요. 김 선배는 상과대에서 소위 데모 잘하는 애들을 4명 뽑아서 공활을 보낸 거지요. 한 달을 했는데 평생 동안 할 수는 없겠더군요. 이 모습을 지켜본 김 선배는 ‘너의 계급적 한계’라고 얘기했죠.”
흔들리는 노동계의 ‘아이콘’
1980년 한일공업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문수는 그해 2월 여느 때처럼 노조사무실에서 청소를 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복 차림의 형사 2명과 마주친다. 그들이 다짜고짜 끌고 간 곳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줄기차게 고문이 이어졌다. 그의 혐의는 반공법 위반이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서울대 선배들이 관련되면서 조사 대상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혐의가 없자 금서였던 책 한 권이 빌미가 돼 42일간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이처럼 1971년 이후 쉼 없이 노동운동가로서 혁명을 꿈꾸며 군사독재 반대투쟁을 주동했던 그였지만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신념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소련에서 나온 영상 자료를 보면 여자들이 좋은 코트도 입고 안경도 좋은 것 쓰고 해서 소련이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
1990년대 초 아내 설란영 씨의 방중 체험기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1994년까지 외국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던 그였다. “집사람이 중국 화장실을 갔는데 아예 문짝이 없더라는 겁니다. 더럽고 냄새가 나서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거죠. 여러 번 ‘진짜냐’고 물었을 정도였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소련 붕괴 후 무역업을 하는 친구들도 소련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 사회주의 국가의 핵심은 도덕성인데 이게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니 호텔에서 청바지 한 장만 줘도 멋진 여성과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썩은 나라들 아닙니까.”
정치 19년, 보수의 아이콘으로…
소련 붕괴에도 혁명에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던 그는 나이 44세에 인생을 180도 바꾸게 될 제안을 받게 된다. 1994년 서울 구로동에 있는 노동인권회관 소장을 맡으며 여전히 노동계를 떠나지 않은 그에게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입당을 권유한 것이다. 강삼재 기조실장과 문정수 사무총장이 당사에서 그를 만나 문민개혁에 동참해 달라며 영입을 제안한다. 김문수는 “고민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서 수용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김문수는 1992년 자신이 비례대표로 출마한 민중당의 실패와 좌절로 방향타를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방황했다. 그러던 중 전혀 다른 삶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김문수는 영입 제안을 받을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의 문민개혁을 나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혁명은 아니지만 과거 군부세력과 비교해 볼 때 금융실명제 등 강력한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머리도 안 좋고 부잣집 아들인데 제대로 하겠나 싶었어요. 그런데 YS가 권력을 쥐니까 잘하더라고요. 그때 권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죠. 밖에서 혁명을 계속 꿈꾼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국 그것(입당)으로서 혁명을 포기했다고 봐야죠.”
그는 민자당 입당 후 노동계로부터 ‘변절자’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1996년 부천 소사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내리 3선 의원과 재선의 경기도지사라는 19년의 정치이력을 쌓는 동안 서서히 ‘보수의 아이콘’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엔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인식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 독재와 싸우며 혹독한 고문을 겪은 그였기에 북한 주민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중국 국경을 넘어가는 탈북자들의 비참한 삶과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되면 총살을 당하거나 수용소에 갇히는 현실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한때 좌파로 살았던 그였지만 1996년 의원 당선 이후에는 북한 인권을 위한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국회 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하던 2005년 1월에는 중국 당국에 탈북자의 난민 지위 인정을 촉구하고 납북자 문제에 전향적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기 위해 다른 의원들과 함께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날아갔다. 베이징 시내 창청(長城)호텔 2층 소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려 했으나 시작하려는 순간 실내등과 마이크가 꺼지고, 사복 차림의 중국 공안 10여 명이 회견장으로 들어와 기자 50여 명을 밖으로 몰아냈다. 결국 회견은 열리지 못했고, 곧바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 한나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 측의 해명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 사건은 한때 한중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특히 그는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이 없던 노무현 정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정부는 2003년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불참한 데 이어 2004년과 2005년에는 표결에 참석했지만 연달아 기권했다. 그는 2005년 북한 주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북한의 반인권 범죄 정보 수집을 위한 북한 인권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활동을 하며 그를 노동운동가 프레임으로만 보던 보수층의 인식에 변화를 줬다.
사실 그는 일찌감치 북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꼽았다.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 씨가 연루됐는데 함께 민중당 생활을 했던 자신은 감쪽같이 속았다는 것이다. “나도 안전기획부가 있는 남산에 끌려갔었는데 이 사람의 장독 안에서 피스톨(권총)과 난수표, 달러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안기부 사람한테 진짜 간첩이냐고 물었다니까요. 좌익이라는 것이 정말 정직하지 않은 것이 문제죠.”
인터뷰가 종반으로 치닫자 대한민국 정통성 문제로 얘기가 옮겨갔다. “헌법과 국사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약해요. 개헌을 하자는 정치인은 있어도 헌법을 우선 지키자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미국은 오만가지 짬뽕(인종)이 모여도 (하나의) 성조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며 “우리도 초등학교 이전이라도 어릴 때부터 태극기는 자랑스럽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신성하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통일은 그의 화두다. “저는 우리나라를 아직 완성된 국가로 보지 않아요. (남과 북에는) 전혀 상반된 가치와 주체가 있어서 적어도 한반도는 통일을 해야 하거든요.” 실제 그는 경제적으로 북한의 노동력 및 천연자원과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결합해 한반도의 경쟁력이 크게 높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통일은 남한의 경제적 부담이 아닌 신(新)성장동력이라는 논리다. 게다가 통일은 중국의 동북 3성과 러시아의 극동도 급속히 발전시키면서 동북아시아 번영의 기회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강력한 국가 안보를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면서 남북 교류를 확대해 북한을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방식의 통일론을 추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직 대통령을 왜곡했다고 비판받고 있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거론하며 인터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교묘하게 잘 만들어요. 우리(보수)는 참 둔하거든.”
고성호·이승헌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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