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한국 창업자엔 지옥으로 가는길
이재열 한국방과후교사협회 대표가 11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송정초등학교에서 자신이 개발한 수업관리 애플리케이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업 실패로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해 본 이 대표는 “개인의 실패와 극복 과정이 사회의 성장 에너지가 될 수 있도록 실패도 자원이라는 인식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1일 오후 서울 강서구 공항동 송정초등학교. 한국방과후교사협회 이재열 대표(43)는 방과후학교 교사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자신이 개발한 방과후학교 수업관리 앱(응용프로그램) ‘클래스베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대표가 1년 넘게 공들여 개발한 이 앱은 학생들의 출석 여부를 학부모에게 문자로 알려주는 출석관리 같은 편리한 기능 덕분에 400여 개 초등학교, 1800여 명의 교사가 쓸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이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20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창업 실패, 가족과 지인들의 외면, 자살 시도, 수감생활은 그를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때, 클래스베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하지만 국내 창업자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기는커녕 단순한 실패로도 남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다.
동아일보와 전략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코리아의 ‘동아·베인 창조경제지수(DBCE지수)’를 분석한 결과 한국은 ‘성공의 선순환’ 단계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4개국과 중국 등 조사 대상 35개국 중 28위에 그쳤다. 창조경제의 4단계 가운데 아이디어 창출과 함께 매우 취약한 부분이다.
‘성공의 선순환’이란 창업에 우호적인 토양을 바탕으로 벤처기업가가 커 나갈 수 있고, 적절한 시점에 자신의 지분을 팔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이 보상을 또 다른 창업활동에 투자해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실패한 창업자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성공이나 실패의 경험이 묻히지 않고 창업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건도 성공의 선순환에 중요하다.
미국 최대 전자결제서비스기업인 페이팔(PayPal)의 핵심 창업 멤버들은 ‘페이팔 마피아’로 불린다. 지분을 팔고 나간 뒤에도 벤처 생태계에 남아 후배 창업자들에게 조언과 투자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재투자한 페이스북, 유튜브, 링크드인 등은 미국 정보기술(IT) 업계의 리더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성공의 무용담도, 실패의 교훈도 잘 공유되지 않는다.
이 대표는 대학에 다니던 1992년 학원 겸 교육기업 ‘에디슨진학연구소’를 세웠다. 1994년에는 큐뱅크라는 문제은행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학원 수강생이 절반으로 줄었다. 첫 시련이었다. 힘들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1990년대 말 벤처 붐이 일자 그는 다시 도전했다. 인터넷 생활정보 서비스업체 ‘인포라이프’를 차려 10억 원을 투자받았다. 29세의 나이에 벤처기업 대표가 됐다. 하지만 경영에는 문외한이었다. 사무실 인테리어에 돈이 줄줄 샜고 자신보다 나이 많은 경영진은 감당이 안 됐다. 2년여 만에 자본금 10억 원은 사라졌다.
회사가 망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4년간의 도피생활이 시작됐다. 공사판 막일을 하며 자살도 여러 번 생각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차라리 사형시켜 달라”고 했다. 40일 동안 교도소 생활도 해봤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 파산면책을 받았다. 그러나 ‘낙오자’라는 낙인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클래스베리로 재기를 노리고 있는 이 대표는 “나를 아는 이들 모두가 내가 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반면 한국은 창업에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DBCE지수를 구성하는 핵심지표 중 ‘창업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29위로 하위권이다. 문규학 소프트뱅크코리아 대표는 “실패한 창업자들의 실패 과정을 잘 지켜보고 실패 평가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정직한 실패라면 재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고 재투자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너무 어려운 패자부활
그는 재기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개인파산 신청 후 1년 3개월이나 지난 지난해 9월경에야 파산면책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세금 미납문제 등으로 인해 아직도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다. 1995년부터 자동차부품업체에서 일해 왔고 2008년 기술벤처로 창업을 한 그에게 “일을 도와 달라”고 제의하는 업체는 많지만 그마저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다.
이처럼 복잡한 파산절차는 패자부활을 어렵게 만드는 한국 벤처업계의 고질적인 병폐다. DBCE지수 중 실패한 창업자가 다시 창업하기 쉽게 법적 파산처리 절차가 돼 있느냐를 따지는 ‘파산절차 용이성’에서 한국은 35개국 중 최하위권인 31위였다.
○ 창업 성공을 폄하해서야
승자의 성공 공식을 지속적으로 창업 생태계에 확산해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도 패자부활 시스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은 창업자가 대우받지 못하고 대기업도 벤처기업의 인수에 소극적이어서 선순환 구조의 정착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창업으로 큰돈을 번 기업가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로는 창조경제가 안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엔젤투자 활동을 하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나 노정석 태터앤컴퍼니 창업자 등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최정수 베인앤컴퍼니코리아 이사는 “한국은 성공 창업자의 재투자 문화가 이제 형성되고 있는 단계”라며 “미국, 이스라엘처럼 승자와 패자를 모두 포용하고 이들을 경제 시스템 내에서 재활용해 국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우·박창규 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