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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문명]매킨지 보고서와 자서전

입력 | 2013-04-24 03:00:00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국내 저명한 역사학자와 대화를 나누다 “요즘 원로들을 만나면 자서전을 쓰시라고 권하고 있다”는 대목에 공감했다. 권유를 받은 당사자들은 다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해야 해 쓰기가 어렵다”며 손사래를 친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 학자는 “공개는 사후에 하더라도 기록은 반드시 남기라”고 권한단다. 역사학자에게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도 요즘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8일자부터 시작한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쓰면서 당시 시대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펴낸 자서전과 기록들의 힘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만약 이 기록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사자들은 기록을 남길 당시만 해도 그것이 훗날 어떻게 쓰일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큰 도움이 된 자료 중 하나가 송철원(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부자(父子)의 기록이다. 기자는 1964년 6·3항쟁의 주역으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던 송 이사장 사무실을 찾아가 보고 깜짝 놀랐다. 은퇴 후 그는 수년 동안 6·3에 대한 기록에 매달려 ‘아! 문리대’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놀랄 만큼 6·3의 역사가 생생하게 복원됐다. 이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또 다른 사람의 기록 덕분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부친 고 송상근 옹(2010년 작고·서울시립병원장 철도병원장 역임)이다.

아들이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던 순간의 기쁨과 당시 서울대 입시 본고사 점수, 경쟁률까지 기록해놓은 송 옹의 일기는 점점 유신독재의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하는 역사적 기록으로 바뀐다. 의사였던 그는 당시 학생 운동권의 전담의사나 마찬가지였다. 폐병 걸린 김지하를 요양원에 입원시킨 것도 그였다.

송 옹은 6·3 관련 신문 보도뿐 아니라 관련 학생들의 입건에서부터 재판 과정, 결과까지 도표로 상세하게 정리했다. 담당 판사 검사들 이름도 적어놓았다. 여기에 운동권 주요 멤버들 간에 오간 서신, 선언문 격문들, 아들이 도피생활 중 보낸 편지, 구속통지서, 감옥에 넣은 영치금 영수증, 면회일지까지 모두 모아놓았다. 그의 기록은 국가공무원 신분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결국 미국 이민을 가는 바람에 끊기지만 총 분량이 소형트럭 적재량의 절반가량이나 된다.

1991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매일경제신문사가 이동원 전 외무장관의 구술을 정리해 연재한 한일회담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 서문에는 과거를 정리하는 일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자물쇠가 풀어지고 거미줄에 걸려있는 과거를 하나씩 걷을 때마다 손에 묻어나는 더러움은 나를 더욱 (회고록 쓰기에) 주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는 티가 묻었든 기름이 칠해있든 그대로 살려야 한다. 화장도 꾸밈도 잊어야 하며 슬픔도 사랑도 모두 진실의 그릇에 담아 내놓아야 한다. 우리의 2세, 미래에게 진실을 망각한 과거로 인해 또다시 실수를 반복시킬 수는 없잖은가.’

미래와 창조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웬 과거 타령이냐” 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요즘이다. 과거를 아는 과정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지,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갈 길이 바쁠수록 지난 역사를 차분하게 돌아보자. 그리하여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맞는 것을 찾아보자. 유럽도 그리스 로마시대의 복고주의 문예부흥(르네상스)을 통해 중세 어둠을 극복하고 근현대로 힘차게 나아갔지 않았나.

최근 한국 경제의 위기를 진단한 매킨지 보고서가 화제가 됐다. 보고서는 현재와 미래만 보지만 창조는 어쩌면 ‘과거’에서 나온다. ‘과거’에 새로운 미래가 있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