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1960∼2011)
죽음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쿨하게 가고 싶다.
의연하게 인격을 지키고 통증을 다스리고
칭찬받는 환자이고 싶다. 난처한 물음도 안 던지고
회진이 늦어도 불평하지 않고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누가 예술 작품을 위해 순교하는가.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둘이든가.
불 보듯이 꺼진 불을 만져서 재차 확인하듯이
그런데 왜 그것이 나는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이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안 좋아졌다고
삐치고, 차도가 있다는 그 말을 듣기 원하는가.
아내의 표정을 훔쳐보고
문병객의 눈길로 바로 치어다보기 어려워하는가.
왜 이런 걸 적어 새로운 무덤을 또 짓는가.
마음의 거처? 슬픔의 집적소?
왜 쿨하지 못하고 왜 농담도 못 받아넘기는지.
아가씨들이 두 번째로 선호하는 신랑감이 군인이란다. 첫 번째는 민간인. 아마도 한 군인의 자조적인 입이 출처일,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개다. 세상을 자기가 처한 곳과 다른 모든 곳으로 이분(二分)해서 느끼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병이 위중한 사람들. 생의 버팀막이 얇아진다 싶으면, 여태 아무렇지도 않게 속해 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급기야 낯설게 느껴지고, 그 고립감이 병환 자체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두려울 테다.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데’, 그런데 안 된단다. 의사와 가족의 안색을 살피고 눈치만 보게 된단다.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둘이든가’, 자기를 위로해 보지만 위로가 안 된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참으로 의연하고 또 의연하고 싶은데!
오늘은 내 시우(詩友) 윤성근의 기일이다. 그는, 물론 덜덜 떨렸겠지만, 넘치게 의연했다. ‘꺼진 불’은 그가 병상에서 쓴 시들을 묶은 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 속의 한 편이다. 근친 외 누구도 그가 아픈 걸 몰랐고, 한 장수처럼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해 친구들은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아마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애써 농담을 했을 테고 의사에게 칭찬 듣는 환자였을 것이다. 누구나 어차피 맞닥뜨리는 죽음이다. ‘웰빙’만 외칠 게 아니라 그와 한 짝으로 ‘웰다잉’, 좋은 죽음, 좋은 사라짐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