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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김화성]어머니, 제 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입력 | 2013-04-24 03:00:00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봄이 뻐근하다. 저녁놀에 부걱부걱 술 익는 소리가 들린다. 술꾼들은 ‘꽃피는 짐승’이다. 발밤발밤 주막집 골목을 어슬렁거린다. 꽃잎 어지럽게 흩어진 고샅길. 며칠 동안 가랑비와 보슬비가 갈마들며 흩뿌린 탓이다. 비거스렁이로 부는 바람이 자못 칼칼하다. 나뭇가지에 여린 잎들이 아가들 젖니처럼 우우우 돋아난다. 천지가 온통 연둣빛 풀물이다.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가 봄밤 술청을 달군다. 가슴이 저려온다. 역시 그의 리메이크 노래 ‘봄비’가 이어지고, 곧 피를 토하듯 ‘찔레꽃’ 노래가 울려 퍼진다. 왜 그는 찔레꽃을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다’고 했을까. ‘또랑 광대’ 같은 그의 지나온 밑바닥 삶이 두고두고 서러웠을까.

아직 그의 봄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강바닥에서 퍼 올린 듯한 말간 슬픔은 ‘꽃구경’에서야 비로소 끈적끈적한 진액으로 배어나온다. 김형영 시인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를 제목만 ‘꽃구경’으로 바꿔 불렀다. 그 옛날 부모가 늙고 병들면 깊은 산속에 버리던 풍습(고려장·高麗葬)을 애틋하게 그렸다.

‘어머니, 꽃구경가요./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어머니 좋아라고/아들 등에 업혔네.//…//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가슴이 먹먹하다. 창자가 울컥 쏟아질 것 같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렇지 않을까. 모두들 소리 죽여 진한 속울음을 운다. 역시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는 악보에 표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영락없는 ‘푹 삭은 서해바다 젓국’이다. 반주 없이 생목으로만 부르는 게 절창이다. “엄니, 지금 머 허신대유∼!” 어눌한 그의 충청도 홍성 광천 촌사람 말도 그대로 가슴을 후벼 판다. 명치 아래에 뜨거운 뭔가가 ‘후욱’ 올라온다.

그렇다. 봄밤은 짧아서 슬프다. 꽃이 쉬이 져서 서럽다. 그래서 시인들은 ‘봄날은 간다’에 필이 꽂힌다.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로 단연 그 노래를 꼽는다.(계간 ‘시인세계 2004년 봄호’ 시인 100명 설문조사) ‘봄날은 간다’를 부르면 ‘그냥 목이 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디 시인들만 그럴까. 대한민국 남자들의 봄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를 흥얼대며 시작되고, ‘봄 나∼알은 가아∼안다’를 울부짖으며 끝난다.

1953년 대구유니버설레코드사에서 가수 백설희가 발표한 노래.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손로원(1911∼1973)이 노랫말을 썼다. 손로원은 철원 출신의 청상과부 외아들. 전국을 떠돌며 그림 그리고 시 쓰며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들은 목 놓아 울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늘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네가 장가드는 날, 난 열아홉 시집 올 때 입었던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을 거야.” 아들은 어머니를 그리며 미친 듯이 노랫말을 써내려갔다. 손로원은 사시사철 고무신에 검은 점퍼를 입고 다녔다. 그는 ‘막걸리대장’으로 불렸을 정도로 모주꾼이기도 했다.

이미자 배호 나훈아 문주란 조용필 한영애 이동원 장사익 김도향 주현미 심수봉 최백호 하춘화 오승근 김수희 박은경….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가수들도 앞다퉈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밤새도록 여러 가수들의 ‘봄날은 간다’만 들려주는 주막집도 있다. 주당들은 ‘누구 노래인지 알아맞히기’에 목을 맨다.

저마다 도저한 감칠맛이 있다. 한영애 이동원의 노래는 들큼하고 알싸하다. 심수봉 최백호 김도향의 목소리는 새큼하고 슴슴하다. 조용필 장사익의 절절한 소리는 구뜰한 묵은지 맛이다.

산수유꽃 매화꽃이 이울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꽃도 하나 둘 숙지고 있다. 벚꽃은 건들바람에 땅바닥에 나뒹군다. 지난해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벌써 붉은 명자꽃이 피고, 라일락꽃 향기가 코끝에 걸린다.

‘한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가진 것 다 잃어버린/저기 저, 발가숭이 봄!’ 김종철 시인은 ‘그냥, 꽃 진 자리에서 한 스무 해쯤 살았으면 좋겠다’고 노래한다. 꽃 피우지 말고 바보처럼 한 세상 살다 가고 싶다는 거다. 그렇다. 봄! 봄! 그리 빨리 가려면 오지나 말지. 우리의 봄날은 이렇게 속절없이,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