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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자상한 아빠가 운전만 하면 헐크처럼 변해요”

입력 | 2013-04-24 03:00:00

[시동 꺼! 반칙운전/3부]<2>초등생들의 눈에 비친 교통문화




신호등 ‘노란 불’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시나요? 곧 빨간 불로 바뀌니 속도를 줄여 멈추라는 뜻인데 지키는 어른들은 정말 찾기 어렵죠. 속도를 높여 ‘쌩’ 지나가려다 정지선을 한참 넘어 멈춘 차들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나요? 매년 5000여 명의 교통사고 사망자 중 걸어가다 사고를 당해 숨진 사람은 2000명이 넘습니다. 횡단보도를 밟고 멈춰 선 차량. 아이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어린이들이 여기저기서 고사리 같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저요, 저요!” 대답이 쏟아졌다. 어린이들이 참았던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마다 듣고 있던 기자는 뜨끔했다. 내 이야기 같았다. 토론 주제는 ‘어른들의 반칙운전’.

동아일보 취재팀은 3일 서울 개운초교, 7일 서울 연희초교에서 각각 열린 교통안전교실에 참여했다. 이 교실은 도로교통공단과 성북경찰서 등이 함께 마련했다. 취재팀은 어린이들에게 아빠 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탈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물어봤다.

○ 운전대 잡으면 아빠 엄마는 왜 변할까요?

“아빠와 대형마트에 갔는데 주차를 하다 다른 아저씨와 말다툼이 벌어졌어요. 아빠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막 욕을 했어요. 그 아저씨도 차 창문을 내리고 아빠에게 욕을 했어요. 아빠가 나중에는 차에서 내려서 싸우려고 했어요. 무서웠어요.”(연희초 2학년 노모 양)

평소 한없이 친절하고 자상하던 아빠 엄마가 운전할 때 왜 ‘헐크’처럼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지 어린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화내고 욕하는 부모의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취재팀이 “운전 중 엄마 아빠가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묻자 아이들이 시끌시끌해졌다. 70명 중 열다섯 명이 손을 들었다. 아빠 엄마가 서로에게 “아∼씨” “운전 똑바로 해, 죽을래?” “짜증나” 등의 험한 말을 하는 걸 봤다는 어린이도 여럿 있었다.

운전 중 다툼이 실제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장면도 나왔다.

“아빠가 운전해서 가족이 시골에 가던 길이었어요.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으려 했는데 엄마는 시간이 없다면서 그냥 가자고 했어요. 두 분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나중에는 화가 난 아빠가 갑자기 핸들을 콱 돌렸어요. 차가 기우뚱 하면서 몸이 문 쪽으로 밀렸어요. 머리를 창문에 ‘쾅’ 부딪혀서 아팠어요. 엄마는 화를 내면서 아빠를 혼냈어요.”(연희초 2학년 고모 군)

한 여자 어린이는 “유치원생 때 매일 할아버지가 타는 오토바이 짐칸에 타고 유치원에 갔다”며 “그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탔는데 지금 다시 오토바이 뒤에 타라면 무서워서 못 탈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앞에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한 교사는 “쉬는 시간에 아이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집에서 부모님이 어떤 운전 습관을 갖고 있는지 세세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빵빵차’와 오토바이가 무서워요

도로에서 만나면 가장 무서운 차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과속 차량’이나 ‘끼어들기’ 등의 답변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큰 차’였다.

“길을 걸어갈 때 버스나 트럭이 바로 앞이나 옆에 있으면 운전하는 아저씨가 안 보여요. 마치 운전석에 아무도 없이 투명인간이 운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아저씨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아저씨도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요.”(개운초 1학년 최은서 양)

키가 작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사각지대’에 있어서 위험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큰 차’ 다음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차는 ‘빵빵차’(경적을 크게 울리는 차)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크게 ‘빵빵!’ 소리가 들렸어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어요. 뒤를 돌아보니까 덤프트럭이 있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한참 뒤에도 심장이 콩닥콩닥 했어요.”(개운초 1학년 강예지 양)

차로와 인도를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무서운 차’로 꼽은 아이도 있었다. 신서원 군(연희초 2학년)은 “친구와 길을 걸어가는데 짐을 실은 오토바이가 갑자기 인도 위로 올라와 달려왔다”며 “친구가 부딪힐 뻔해서 ‘위험해!’ 소리 지르며 친구를 확 잡아끌었다”고 말했다.

○ 조금만 부드럽게 운전하면 안 될까요

자신이 탄 차가 과속하거나 난폭하게 달릴 때 위협을 느꼈다고 회상한 어린이도 있었다.

“태권도장 통학차를 탔는데 친구들이 안전벨트를 채우기도 전에 차가 먼저 출발했어요. 엄청 빨리 달리면서 차로를 이리저리 바꿨어요. 몸이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유리창에 머리를 여러 번 부딪혔어요.”(연희초 2학년 고안진 군)

길에 차를 세워놓고 욕을 하며 싸우는 어른들의 모습도 어린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골목에서 아저씨들이 차를 세워놓고 싸우는 모습을 봤어요. 길이 좁은데 차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어요. 아저씨들이 손으로 몸을 밀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며 이상했어요. 한 사람이 조금만 뒤로 물러나면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연희초 2학년 방주희 양) 다가오는 차에 대처하는 어른의 차이도 드러났다. 골목 등에서 차가 빨리 다가오면 어른은 쉽게 피하지만 어린이는 달랐다.

“갑자기 눈앞에 차가 나타났는데 뛰어야 할지, 서 있어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그 자리에 그냥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피하라고 배웠는데 막상 차를 보니까 머릿속이 멍해졌어요.”(연희초 2학년 정수아 양)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일반적으로 성인이 가까운 거리에서 다가오는 차를 인지해서 피할 수 있는 최대 속도가 시속 약 30km”라며 “하지만 어린이는 성인에 비해 상황판단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갑자기 나타난 차와 맞닥뜨린 경험도 적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서있기 십상이다”고 설명했다.

연희초교 정창석 교장은 학교에서 안전교육을 받아도 부모의 잘못된 운전습관을 자주 접하면 어린이가 성인이 된 뒤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와 가정에서 전달받는 ‘정보의 불일치’가 생기는 셈인데 이 경우 부모가 전달하는 정보가 영향력이 더 크다”며 “부모가 늘 자녀를 의식하고 안전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택·서동일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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