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 ‘침략 부정’ 발언에 외교 파장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 위협으로 소강 상태였던 동북아시아 외교 갈등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잇단 우경화 발언과 일본 각료와 정치인들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집단 참배로 다시 불붙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26, 27일로 예정했던 일본 방문을 22일 전격 취소했다. 다음 달 초로 예정됐던 일본 자민당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부총재 일행의 중국 방문 일정도 이날 취소됐다. 고무라 부총재는 중국 수뇌부를 만나 양국 간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정지작업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공무를 핑계로 면담을 피하자 일정을 취소했다.
한중일 외교관계를 복원할 실마리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이 근본적으로 우경화에 치우쳐 있기 때문. 아베 총리는 이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마루야마 가즈야(丸山和也) 자민당 의원이 무라야마 담화 내용 중 ‘머지않은 과거 한 시기’, ‘국가정책의 잘못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등 3개 문구에 대해 “모호하게 그저 ‘미안합니다’고 하는 무사안일주의로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자 “담화에서 그런 문제가 지적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동조했다.
또 마루야마 의원이 “식민지 지배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것과 한국과 일본처럼 합의에 의해 병합한 것은 다르다”고 주장하자 아베 총리는 이를 부정하지 않은 채 “침략에 대한 정의는 확실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아베 총리는 22일 참의원 답변에서도 “아베 내각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문부성은 1982년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진출’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 등으로 왜곡해 외교 갈등을 초래한 바 있다.
다른 각료들의 역사 인식도 마찬가지다. 21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는 이날 한국과 중국의 반발에 대해 “그동안 매년 2, 3차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새삼스럽게 이야기될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중국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참배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국가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담당상은 윤 장관의 방일 취소에 대해 “이런 (방일 취소) 문제는 자주 일어난다. 심각한 영향이 있다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말 한국을 방문해 류길재 통일부 장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등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신사 참배 직전인 지난주 말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일본에는 신교(神敎)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각료든 국회의원이든 (신사 참배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 인식이라면 일본의 각료와 정치인들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일인 8월 15일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개연성이 높다. 7월 참의원 선거 이후 평화헌법 개정 추진 움직임에도 봇물이 터질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관계 복원의 실마리를 찾더라도 이내 원점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사태 악화를 우려한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도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국익을 해치는 무신경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행동을 하지 마라”라고 촉구했다.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박근혜정부 초기부터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발언과 행동을 노골적으로 이어 가는 일본의 관료와 국회의원들에게 깊은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날 외교부에서는 “아베 내각의 역사인식이 의심된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외교적으로 강도가 상당히 센 발언이다.
도쿄=배극인·박형준 특파원·이정은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