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시장 향후 역할
그야말로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선진 4개국과 신흥 4개국 간의 경제 규모가 대등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흥시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어떤 역할을 했을까? 또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매년 발표하는 선진경제와 신흥경제의 성장률 데이터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2009년 선진경제가 ―3.5%의 역(逆)성장을 하며 경기침체를 겪을 때, 신흥국들은 2.7% 성장함으로써 세계경제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 역시 앞에서 나온 숫자들만 잘 살펴봐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간판 신흥국들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과 맞먹는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성장률이 2∼3배 높은 신흥시장이 향후 세계경제에 더 큰 공헌을 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다만 기대수준을 조절할 필요는 있다. 향후 수년 간 이머징 마켓의 ‘구원투수 등판’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덜 화려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예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향후 수년간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저성장’ 구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선진-신흥국 간 경제성장률 차이가 금융위기 이전보다 한층 좁혀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2007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는 미증유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설비)투자 ‘슈퍼’ 사이클에 힘입어 많은 국가들이 혜택을 입었다. 소재섹터 비중이 큰 한국이 대표적이었고, 러시아와 브라질은 물론 다른 자원 부국들도 수출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다 보니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GDP 성장률 차이가 연간 6%포인트를 넘어섰다. 하지만 올해부터 몇 년간 이러한 투자 붐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이 같은 혜택을 누리던 신흥시장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위기 전보다 못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2014∼2017년 선진국과 신흥국 간 경제 성장률 갭이 3%포인트대로 좁혀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머징 마켓의 ‘구원투수’ 역할이 위기 이전보다 덜 위력적일 것으로 보는 또 다른 근거는 국가별 주가지수의 주가수익배율(PER·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통상 고성장 국가나 고성장 섹터 주식들의 PER는 높게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당장의 수익보다 미래의 이익성장 잠재력을 믿어 주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위기 전에 40배를 넘던 중국 주식시장의 PER는 이제 10배 밑으로 하락했고 한국(8.5배)을 비롯한 주요 신흥국 역시 장기 평균 대비 낮은 편(10.3배)이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선진 주식시장은 역사적 평균 수준(13.2배)에 근접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머징 마켓이 저평가되어 보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효율적으로 미래를 반영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신흥경제의 향후 성장성이 이전보다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에 더욱 무게가 쏠린다.
결론적으로 신흥시장은 지난 수년간 어려움을 겪던 세계경제에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성장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향후 ‘구원투수로서의 구위’가 위기 이전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재성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PvB/PiB사업팀 부장
이재성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PvB/PiB사업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