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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금오도 비렁길의 따순김 마을

입력 | 2013-04-25 03:00:00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시사프로 ‘눈을 떠요’ 진행

전남 여수 백야도 선착장을 떠나 금오도로 가는 배 안에서 선원은 “여수에 사는 사람들도 금오도 비렁길을 가보고 이런 데가 다 있었냐고 놀랍니다”라고 말했다. 여수시에는 섬이 365개나 있다. 거문도 백도를 비롯해 금오도 개도 사도 낭도 안도 초도 등 아름다운 섬들로 이루어진 다도해국립공원이다.

벼랑을 이곳 사투리로 비렁이라고 부른다. 금오도 비렁길은 최근 2, 3년 새 알려진 트레킹 코스다. 차도가 생기기 전에 섬사람들이 바닷가 벼랑을 따라 오가며 삶을 꾸려가던 길이다. 섬에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비렁길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가 최근 제주 올레길 같은 트레킹 코스 개발 붐이 일어나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작년 7월에는 행정안전부가 ‘우리마을 녹색길 베스트 10’으로 선정했다. 총연장 18.5km의 비렁길은 모두 5개 코스로 나뉜다. 일정이 바쁜 사람들에게는 3코스(직포∼학동)와 1코스(함구미 선착장∼두포)를 권하고 싶다.

이른 아침 직포항에 닿아 섬에 두 명 있는 문화해설사가 안내하는 민박집에서 8000원짜리 백반을 먹었다. 가사리국에 청다리 돌김 무침 같은 해초로 만든 반찬들이 입맛을 돋우었다. 갯가에서 잘 자라는 방풍나물은 전국 생산량의 80%가 금오도에서 나온다. 주민 중에는 두어 달 방풍나물 재배를 해 2000만∼3000만 원의 소득을 거뜬히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금오도는 우리나라에서 21번째 큰 섬. 주민은 1600여 명이다. 금오도는 예부터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쓰이는 황장목이 나던 곳으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출입이 금지돼 자연환경이 잘 보전될 수 있었다고 한다.

3코스로 들어서면 동백나무 터널이 이어진다. 동백은 11월 말경부터 이듬해 4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금오도 3코스를 걷다 보면 길 위에 동백꽃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다른 꽃들은 이파리가 하나씩 낙하하지만 동백은 가장 화려할 때 봉오리째 떨어진다. 금오도의 동백은 두 번 핀다. 동백나무 위에서 한 번 피고 비렁길 위에서 또 핀다. 동백 숲 터널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다도해는 옥색 하늘색 에메랄드색 파란색으로 출렁인다.

3코스에는 소사나무 군락지가 많다. 남쪽의 섬들에는 상록수가 많아 사계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금오도의 소사나무는 사계의 변화를 알려주는 수종이다. 금오도 곳곳에서 야생 갓을 만날 수 있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원조 갓김치가 바로 여수 돌산에서 생산된다. 노란 꽃을 피우는 야생 돌갓은 이미 쇠어 버려 김치를 담가먹기엔 너무 억세다. 잘 담근 갓김치를 씹으면 쌉쌀한 갓 향이 입맛을 자극한다. 와인이나 막걸리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4코스에는 10여 가구가 살던 ‘따순김’이라는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대나무 숲과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던 개울이 옛 사람들의 자취를 말해준다. 농촌 마을에 가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많지만 따순김은 한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바닷가 폐촌(廢村)이다. 섬에서도 오지인 마을에 살던 노인들이 하나둘 죽으면서 폐가들이 생기고 그마저 남은 사람들도 대처로 이사 가면 마을이 텅 비는 것이다. 금오도에는 자식들을 대처로 내보내고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이들이 죽고 나면 폐가가 되겠지만 요즘은 낚시나 트레킹하러 왔다가 이런 집을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해나 남해의 섬에는 초분이라는 장례 풍습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육탈(肉脫)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매장하는 장례법이다. 4코스에도 돌담으로 쳐진 초분 터가 보존돼 있었다. 금오도 비렁길은 그 자체가 자연식물원이지만 문화인류학적인 콘텐츠를 덧붙인다면 더 흥미로운 트레킹이 될 것이다.

금오도는 커다란 바위섬이다. 바닷물이 닿는 곳은 바위의 맨살이 드러나 있다. 바위가 오랜 풍화(風化)작용을 거치고 나무와 풀의 퇴적물이 쌓여 토양이 됐다. 비렁길 주변의 밭들에는 돌담이 쳐져 있다. 밭을 일구다 주워낸 돌로 축대 겸 담을 쌓고 경계를 표시했다. 조상들이 힘겹게 가꾼 밭들이 지금은 경작하는 사람이 없어 초목이 무성하다. 버려진 밭둑에서 물곳(무릇)이 자라고 있었다. 물곳의 둥근 뿌리는 단맛이 나서 섬사람들이 기근 때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

바닷가 소나무들은 작년 태풍에 바닷물이 수십 m씩 솟구쳐 덮치는 바람에 빨갛게 말라죽은 가지들을 달고 있었다. 태풍이 호우를 함께 몰고 왔더라면 바닷물을 씻어낼 수 있는데 바람만 거세게 불고 비가 오지 않아 소나무들이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미처 물 샤워를 못한 것이다.

금오도 면소재지 마을에서 어부가 그물로 잡아온 볼락 자연산 회를 점심에 곁들였다. 비렁길에 외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이런 별미도 점점 귀해질 것이다. 마침 금오도에서 가까운 순천만에서는 국제정원박람회가 10월 20일까지 열리고 있다. -여수에서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시사프로 ‘눈을 떠요’ 진행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