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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한일회담 반대투쟁 전면에

입력 | 2013-04-25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4>단식농성




1964년 5·20시위 이후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단식농성에 들어간다. 단식 학우들에게 보리차를 따라주는 여학생의 모습이다. 동아일보DB


정보부의 학원사찰 실태를 폭로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하다 1964년 5월 22일 경찰에 붙들려 간 송철원이 박한상 인권옹호위원장(오른쪽)에게 담뱃불 고문을 당한 손을 보이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민주화운동세력과 박정희 정권이 정면충돌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4월 22일 최두선 국무총리에게 보낸 훈령을 통해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 불법 데모로 치안을 교란하는 자들을 철저히 단속해 법질서 유지에 힘쓰라”고 강력하게 지시한다. 그러면서 “학생 데모가 국기(國基)의 대본(大本)을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며 그 책임으로 ‘몰지각한 일부 학생들’ ‘태만한 학교 책임자들’ ‘무책임한 언론’ ‘정부의 우유부단함’을 꼽았다.

이런 대통령에게 정면 도전을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장준하였다. 그는 조선일보 5월 26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대통령을 ‘박정희 씨’라고 부르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대통령 박정희 씨! 당신이 그렇게도 거짓말과 실정을 거듭하였으면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당신들 집권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렇게 창일하였으면서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것, 민생이 이렇게까지 파탄에 빠졌는데도 아직 큰소리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언론이 당신들을 길러준 덕이 아닌가요. 당신들과 정사를 할 것 같던 한국 언론은 소용돌이치는 국민의 원성과 압력에 못 이겨 이제서야 깊은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고마운 줄이나 아시오! 그 청렴하다고 소문이 높던, 그 강직하다고 정평이 있던, 그 육군 소장 박정희 씨라면 오늘의 이 사태를 정시(正視)하며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요.’

언론들은 당시 학생들의 시위가 비록 ‘대일굴욕외교’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 뿌리에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다고 지적했다. 1964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불신의 원인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첫째, 5·16이 비록 동기는 선(善)이었다 해도 태생적으로 비헌법적인 ‘쿠데타’였다는 것, 둘째 민간에 정권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셋째 부정부패 일소에 실패했다는 것, 넷째 공화당의 부패와 다섯째 민생고, 여섯째 학원사찰, 일곱째 중앙정보부 등이었다.

마침내 5월 27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박 정권의 하야를 권한다’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5·16 후 최초로 ‘하야(下野)’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같은 날 지식인들도 나섰다.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5·16 후 최초로 ‘시국수습결의문’을 채택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을 한다.

당시 김지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말이다.

“(고문당하고 풀려난) 송철원 집에서 이틀째 밤을 새우며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 운동의) 제일선에 섰던 리더들이 모두 수배되어 몸을 감춘 상황에서 제2선들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단식농성을 계획했다. 장소는 문리대 캠퍼스 4·19 학생혁명기념탑 아래였다. 김덕룡 형이 이끄는 문리대 학생회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총책임을 손정박이 맡았다. 나는 ‘방송선전반’을 맡았다.”

바야흐로 김지하가 학생운동권에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는 노출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5·20 장례식 조사(弔辭)도 당시 현장에서 낭독한 송철원이 쓴 것으로 알려졌었기 때문에 경찰 수배망에서도 비켜가 있었다. 김지하는 문리대 후배인 사학과 이현배와 함께 단식농성을 주도한다. 5월 30일 단식농성의 막이 오른다. 다음은 신동호의 책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중 일부다.

‘이날 오후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상 최초로 채택된 새로운 투쟁 형태였다. 당시 학생시위는 선언문이나 읽고 곧바로 가두로 진출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데모가도 애국가나 교가, 삼일절 노래, 민족해방가 따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김지하가 농성을 주도하면서 한 차원 격상됐다. 춥고 배고프고 을씨년스러운 단식의 밤, 비에 젖어 축축한 거적 위에서 새로운 시위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선동가, 선동시, 풍자연극 화형식, 매장식, 모의투표 등은 삭막한 농성장을 흥겨운 마당으로 만든 활력소였다.’

이때 만들어진 ‘최루탄가’는 김지하가 ‘새야새야 파랑새야’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1970년대 애창된 데모가가 되었다.

탄아 탄아 최루탄아

팔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지면

박가분(朴家紛)이 지워질라.

꾸라 꾸라 사꾸라야

일본으로 돌아가라

네가 피어 붉어지면

샤미센(三味線·일본의 대표적인 현악기)이 들려올라.


단식농성에서 김지하는 ‘각본, 감독, 주연’의 3역을 맡았다. 5월 31일 밤에는 김지하 작 ‘위대한 독재자’라는 현장 연극도 상연됐다. 단식으로 지친 학생들과 교문 밖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100여 명의 시민이 즐거워했다. 농성장에 담배, 우유 상자, 설탕물이 답지하는 등 시민들의 지지도 잇따랐다. 김지하의 회고다.

“매일 하루 종일 마이크를 붙잡고 농성 상황을 방송으로 계속 알렸다. 목이 완전히 쉬어 친구들이 말릴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피를 뱉으면서 나오는 쉰 목청이 오히려 선전성을 갖는다’고 고집하면서 계속 농성을 이끌었다.”

교내 방송을 통해 단식농성 상황이 실시간으로 알려지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합류하고 여학생들까지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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