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담보있는데도 “보증인 세워라”… 53만명 연대보증 고통
25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황 씨처럼 대출금을 회수하는 안전장치인 담보가 있는데도 금융회사가 보증을 요구해 연대보증인이 된 사람이 제2금융권에만 53만 명에 이른다. 2금융권 대출의 전체 연대보증인이 141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보증인 3명 중 1명은 굳이 보증을 설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 우월적 지위 이용해 과도한 보증 요구
몇몇 저축은행들은 담보만으로는 대출금을 모두 회수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 때만 보증을 요구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담보가치가 부족하다면 대출 규모를 줄였어야 하는데도 이들은 대출 경쟁에 나섰다. 대출을 늘리려고 손쉬운 대출금 회수 장치인 보증에 집착했다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감정가 10억 원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해줄 때 보통 금융권에선 감정가의 60%인 6억 원 정도를 안전한 대출 한도로 본다. 그런데도 금융회사가 무리하게 ‘대신 갚아줄 사람’을 구해 7억∼8억 원까지 대출규모를 늘렸다는 것이다.
○ 설명 없이 “빈칸에 서명하시죠”
연대보증을 서는 사람은 원래 정해진 금액과 기간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특정보증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금융회사들은 소비자의 선택 폭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부산에 사는 전주영 씨는 지난해 중반 저축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친구를 연대보증인으로 데려갔다가 거절당했다. 친구가 1년만 연대보증을 서겠다고 하자 창구 직원이 “기한을 자동으로 연장하는 조건에 동의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이정규 씨는 보증 사고가 터진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은행이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8년 가을, 회사 동료였던 후배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 씨에게 연대보증을 부탁했다. “딱 1년만 보증을 서 주면 된다”는 말에 결국 1억 원 보증서에 서명했다.
예정대로라면 2009년에 보증이 끝났어야 했지만 이 씨는 지난해 은행으로부터 “보증 선 대출 1억 원을 갚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1년짜리 보증인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지만 보증은 자동으로 연장되고 있었다. 보증 내용을 설명해 준 은행원을 찾았지만, 이미 퇴직한 상태였다.
본보가 만난 연대보증인들은 대체로 아들이 사업하거나 친한 동료 및 선후배가 간절하게 부탁하는 데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다는 이유로 보증을 섰다. 하지만 금융회사가 정확한 설명 없이 도장을 찍으라고 압박하기 전에 보증의 위험성을 제대로 경고했다면 피해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17년 전 부친의 연대보증 채무 갚아라”
한영호 씨는 보험회사로부터 17년 전 아버지가 진 연대보증 채무를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된 한 씨는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조정을 받으러 갔지만 해당 보험사가 “계속 채권을 회수하겠다”며 채무조정에 동의하지 않아 재기가 힘든 상황이다.
정필원 씨는 2009년까지 운영하던 기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이런 사실을 기업의 새 주인과 함께 은행 측에 알리면서 해당 기업 대출과 관련한 연대보증인에서 자신을 빼달라고 했다. 은행은 정 씨의 요청을 거절했다. 4년이 지난 지금 정 씨는 과거 운영했던 기업의 대출 문제로 예금을 압류당하는 등 추심에 시달리고 있다.
2005년 벤처회사 공동 창업 당시 사업자대출을 받으면서 연대보증을 섰던 박우상 씨도 재작년 회사를 나왔지만 여전히 연대보증인으로 남아 있다. 박 씨는 “나와 상관없어진 사업자대출에 대해 언제까지 책임지라는 말인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피해를 본 연대보증인들은 “금융사들이 너무 손쉽게 장사한다”며 “불합리한 관행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상훈·한우신·홍수용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