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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명섭]한민족, 조선민족, 김일성민족

입력 | 2013-04-26 03:00:00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한정권이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라는 웹사이트가 유명해졌다. ‘어나니머스’라는 국제좌파그룹의 해킹사건 때문이다. 같은 이름의 패러디 사이트가 CNN에 소개될 정도다. 북한정권은 입버릇처럼 ‘민족사업’을 운운했고, 최근에는 북한정권의 핵무기를 “민족 공동의 자산으로 떠받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군중적 광기를 추앙하는 인민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와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이 ‘우리 민족’에 대한 오해다.

1948년 북한정권 수립 이후 북한주민들의 뇌리에는 단군조선과 이성계가 세운 조선,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승하고 있다는 ‘조선민족’ 개념이 각인됐다. 이들에게 ‘한민족’이란 ‘조선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곁가지에 불과하다. 따라서 ‘북’이라고 할지언정 ‘북한’이라는 호명은 결코 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에서 ‘우리 민족’이란 한민족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따라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한민족의 단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과 달리 대한민국에서 ‘한민족’ 개념이 ‘조선민족’ 개념을 최종적으로 대체한 것은 1950년 1월 이범석 국무총리가 발표했던 국무원고시 제7호에 의해서였다. “우리나라의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이나 사용의 편의상 ‘대한’ 또는 ‘한국’이란 약칭을 쓸 수 있되, 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청산리전투의 영웅이었던 철기 이범석 자신도 1946년에는 그를 따르던 청년들을 모아 건국단체를 만들면서 ‘조선민족청년단’이라고 명명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파견된 선수단의 깃발에도 ‘조선올림픽대표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민족’ 개념과 ‘조선민족’ 개념의 경쟁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광무황제(고종)가 고대의 3한(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적으로 계승한다는 뜻에서 명명한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대한’ 또는 ‘한국’이라는 개념은 제국적 질서에서 벗어난 국제적 ‘독립’의 의미를 내포했다. 여기에 서구에서 사용되던 nation을 번역한 ‘민족’이라는 번역어가 결합되면서 ‘(대)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보급되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한국’을 다시 ‘조선’으로 격하시킨 것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다. 과거 중화제국적 질서 안에서 ‘조선’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일본제국의 지배 하에서 ‘조선’으로 존속해야 한다는 저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 하에서 ‘조선민족’의 개념은 가능했지만, ‘(대)한민족’의 개념은 불가능했다. 안중근 의사는 스스로를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명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인’이라는 호명에 머물렀다.

1945년 광복 이후까지 ‘조선’이라는 이름에 남겨진 민족적 정서를 오용해 ‘조선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한 자폐(自閉)의 길을 걸었던 북한정권은 1994년 김일성 사후부터 불현듯 ‘김일성민족’이라는 개념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북한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글을 ‘김일성민족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김일성민족’이야말로 봉건적 ‘조선민족’이 근대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전후해서 ‘조선민족’이 이미 ‘한민족’으로 변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북한의 ‘조선통사’는 대한제국의 독립에 관해 기술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이 ‘우리민족끼리’ 담론을 내세우며 해외 코리안과 한국민들을 끌어들이는 동안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민족 개념 자체를 배격하는 담론이 유행했다. 서구중심주의적 탈민족 담론의 무분별한 수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3억 명의 중화민족론과 ‘하나의 문명, 하나의 인종, 하나의 언어로 구성된 유일민족’이라는 일본민족론 사이에서 무작정 민족개념을 방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주변 민족에 시나브로 흡수되거나 민족 개념을 무주공산(無主空山) 격으로 ‘조선민족’이나 ‘김일성민족’에 넘겨줄 수도 있다.

‘한민족’은 고조선 이후 조선으로 이어지는 인문(人文)공동체를 계승하면서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한글공동체다. 아직까지 ‘한반도’보다 ‘조선반도’, ‘한민족’보다 ‘조선민족’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소통되고 있는 한류 역시 억압받던 ‘조선민족’이 자유로운 ‘한민족’으로 진보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조선민족’을 ‘김일성민족’으로 더욱 퇴보시키려는 북한정권의 정치적 기획을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민족’이 ‘한민족’으로 진보한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그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 북한주민을 합류시키려는 다양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luesail@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