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8월 서울철수 전날 ‘대만의 눈물’을 보았다
백용기 회장은 “대만과 중국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한국 사람이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이 대만 정부가 수여한 훈장들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타이베이클럽 회장으로 있는 백용기 거붕(鉅鵬)그룹 회장(58)은 한국에서는 대만에서만큼 이름이 나지 않았다. 경남 거제백병원과 경기 화성시 화도중학교, 출판사 등 6, 7개의 기관 및 사업체를 운영하는 중소기업인일 뿐이다. 사업 이외에는 국악과 미술을 지원하는 문화예술 후원에 열심인 정도다.
지난달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11일 대만 입법원은 외국 정부 수반급에게나 주는 입법원외교영예훈장을 백 회장에게 수여했다. 민간인이 이 훈장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다음 날에는 대만 외교부가 주는 외교훈장을 받았다.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직접 그를 만나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2009년에는 대만 경제부가 수여하는 경제전문훈장을 받았다. 한국 사람이 대만 훈장을 3개나 받은 것이다.
이런 스토리를 접하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대만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나 보다’라는 짐작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는 대만에서 어떤 사업도 하지 않는다.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대만 훈장을 3개나 받게 됐을까. 전화로 먼저 대화를 나누게 된 백 회장은 “글쎄요. 저는 그냥 대만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훈장을 받은 연유를 다시 물었다. “대만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정성을 다했을 뿐인데, 그분들이 그 정성을 알아봐 주시고 이렇게 과분한 훈장을 준 것 같습니다.”
아리송한 답변은 기자의 발길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인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이끌었다. 18일 그는 향을 피워놓은 집무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집무실 바깥의 홀에는 대만과의 인연이 짧지 않음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기념품과 사진이 즐비했다. 기념사진에는 마잉주 총통과 대만 금융계의 거물로 이건희 삼성 회장보다 더 부호라는 고(故) 제프리 쿠 전 차이나트러스트 회장 등 대만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의 행적이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저어하는 듯했다.
21년 전의 눈물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대만과의 첫 인연을 물었다.
“20, 30대 때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행차 드나들곤 한 것이 물리적인 첫 접촉이었지요. 어린 시절에는 만주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오신 부모님으로부터 신의(信義)를 중시하는 중국 사람들의 기질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어 호기심과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빙빙 돌던 이야기는 그나마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가 들려준 대만과의 인연은 이렇다.
1970년대 중반 서울시립대 법학과를 다닐 때부터 그는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등 이런저런 작은 사업을 했다. 1989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설계 소프트웨어인 오토캐드를 이용한 컴퓨터 아카데미 태백학원을 열었다. 그때 도입한 약 500대의 컴퓨터가 바로 대만에서 조립한 것이었다. “대만과는 이렇게도 인연이 닿는구나”라고 그때 그는 생각했다.
컴퓨터 아카데미로 돈을 좀 벌었다. 그러면서 지인들과 대만 여행을 자주 다녔고, 사회생활의 폭이 넓어지면서 국내에 있던 대만 사람들과도 친분이 넓어졌다.
그런데 1992년 8월 말 한국과 대만이 단교를 하는 순간이 느닷없이 닥쳤다. 그때는 주한 대만대사관에도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대만의 눈물’을 봐 버렸다.
“당시 화교협회 회장이 서울 용산 크라운호텔 옆에서 ‘대한각’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죠. 한국 철수를 하루 앞두고 대만대사관 사람들이 마지막 식사를 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울분이 섞인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본 그때가 전환점이었다. 백 회장은 한국과 대만의 교류에 매진해야 하는 운명에 빠져버렸다.
한국의 결례
그는 자신이 신의와 예(禮)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피력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인 듯했다. 1992년 단교 당시로 이야기의 주제가 옮겨가자 말소리가 빨라졌고, 그의 눈에는 물기가 비쳤다. 단교 당시 대만 사람들이 느낀 억울함에 공감한 눈물인지, 한국의 결례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묻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의 수교 직전까지도 ‘새 친구를 얻기 위해 옛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며 단교는 없을 것이란 뜻을 대만 정부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수교를 하기 사흘 전에 단교 계획을 통보하면서 72시간 내에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만과 단교를 했지만 계속 유감 성명을 발표한 미국이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이나 일본은 하지 않았던, 한국 내 대사관 등 대만 정부 재산의 중국 이관 조치가 있었습니다.”
백 회장은 대만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 때문에 자신들을 버린 한국 정부의 외교 방식에 여전히 불만이 많다고 했다.
“대만은 6·25전쟁이 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처음으로 파병 동의를 제안했고, 한 끼 줄이기 운동을 펼쳐 전쟁을 겪던 한국에 식량을 지원했던 나라입니다. 그 이전에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한국의 독립을 도왔고요.”
그는 대만 사람들의 단교 당시 심정을 들려줬다.
“대만 사람들도 단교를 해야 하는 한국 정부의 처지는 이해했습니다. 이미 많은 나라가 중국의 압력에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런데 절차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간 부문이 한꺼번에 교류를 끊은 것에 대해서 굉장한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대만인의 서운함을 알게 된 그는 빚을 진 기분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당시 그가 본 대만의 눈물은 21년 뒤에 훈장으로 그에게 돌아온 셈이다.
그는 단교 이후 매년 한두 차례 지인 20∼60명을 데리고 대만을 찾았다. 지금까지 40여 차례 꾸준히 실행했다. 사업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국악인과 무용단원도 데려가 아리랑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렸다. 1990년대 말 천수이볜(陳水扁) 전 타이베이 시장이 잠시 한국에 머물 때 그와 인연이 닿았다. 이를 계기로 천수이볜은 2000년 자신의 총통 취임식 때 손병두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비롯한 한국 경제인을 초청했다. 그도 일행으로 취임식에 참석했다. 당시의 취임식 참석자가 주축이 돼 2002년 한국과 대만의 민간 교류 활성화를 위한 서울타이베이클럽이 발족했다. 곧이어 대만에 타이베이서울클럽도 생겼다.
서울타이베이클럽 덕택에 한국과 대만의 교류 폭은 더 넓고 깊어졌다. 현 주베트남 대만대사는 그와의 우정을 기리는 글을 현지 신문에 기고했을 정도다. 왕 입법원장은 대만을 좋아하는 그를 “대만 사람”이라 부르고, 그는 한국을 좋아하는 왕 입법원장을 “한국 사람”이라 부른다. 21년간 사비를 들여 대만을 찾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격의 없는 사귐은 왕 입법원장이 수훈 축하 만찬을 열어주면서 그를 위해 한국 가수 싸이의 말춤을 춰 줬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저는 대만에 사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어를 하지도 못합니다. 아니, 일부러 배우지 않았습니다. 우정을 나누는 데는 표정이나 몸짓으로도 충분하더군요.”
개인 자격으로 민간 교류를 시작한 그는 국가 간의 일에도 자연스럽게 관여케 됐다. 대만 정부는 한국과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정성을 다했다. 중국의 압력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대만 사절단을 앉히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기도 했다. 결국 문전박대를 당했던 사절단과 새벽까지 통음을 하며 같이 슬퍼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 왕 입법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 6명이 방한했을 때는 사비를 들여 저녁을 대접하며 한국과 대만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발전되기를 축원했다. 이런 우정 어린 정성이 훈장 수여의 근거가 됐을 것이다.
대만 정부에 도움을 준 일은 더 있는 듯했지만 그는 “더 말을 하면 곤란해진다”며 다시 말을 아꼈다. 점심 자리로 이어진 인터뷰는 2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낙관했다. 대만과 중국의 관계가 급속히 좋아지고 있는 만큼 한국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타계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단교 직후의 대만과 한국을 순차 방문하는 과정에서 대만이 서운함을 느끼게 된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는 한국의 외무부 차관에게 “외교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이 중국이란 ‘새 친구’에 몰두하면서 대만이란 ‘옛 친구’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 건 아닌지를 돌아보게 하는 만남이었다.
2013년 3월 백용기 회장(왼쪽)의 훈장 수상을 축하하는 마잉주 대만 총통. 서울타이베이클럽 제공
백용기 회장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그의 집은 행랑어멈을 따로 둘 정도로 제법 잘사는 축에 속했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툇마루에서 맥주를 마시던 아버지가 그를 불러 앉혔다. 어린 아들에게 맥주를 권한 아버지는 “아들아, 나는 네가 밥을 사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다.
그는 이 말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믿는다. 밥을 사는 사람이 되려면 우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정성껏 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밥을 살 수 있다. 이해관계나 겉치레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많은 사람에게 밥을 사기 힘든 법이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서는 거지가 밥을 얻으러 오더라도 상을 차려 정성껏 대접했다. 행랑어멈이 이를 소홀히 했다가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유년의 이런 기억들은 그를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밥을 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실속도 없이 허비하는 것이라는 주변의 지적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돈을 좀 벌고 난 뒤에는 많을 때는 하루에 200명에게 밥을 산 적도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들의 사람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만 사람들은 사람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겉치레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의로 사람을 사귀면 그것을 끝까지 지킵니다.”
물론 대만 예찬론자의 말이니 감안해서 들으시라.
그는 자신이 사람을 살피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무의 뿌리를 대하는 듯이 본다”고 했다. 잎을 보면 계절에 따라 바뀌는 색깔과 크기 때문에 진면목을 놓칠 수 있지만, 뿌리를 보면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