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노래가 청바지를 입고 엎드려 제비꽃에 도취된 느낌,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바운스’는. 낮고 젊고 가벼운 것이 운명을 걸게 만드는 사랑이라기보다 소년의 소녀 사랑 혹은 봄 처녀의 꽃 사랑 같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어색하지 않는, 봄처럼 젊은 감각이 역시 가왕답습니다.
조용필, 가왕입니다. 조용필을 가왕이라 할 때 그 뜻은 노래를 제일 잘하는 가수라기보다 음악으로 세계를 일구고 성을 세운 음유시인이란 뜻이겠습니다. 나는 비교적 늦게 조용필에 반했습니다. 친구들이 “용필오빠”에 미쳐 콘서트를 쫓아다닐 때 무슨 이름이 그렇게 촌스럽냐며 홀로 우아한 척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내게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디오니소스보다도, 오르페우스보다도 더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역시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이름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고, 그 사람의 삶입니다.
실제로 조용필의 콘서트에 가보면 디오니소스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허공이 슬픈 베아트리체의 탄식으로 가득 차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창밖의 여자를 업고 산정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현실과 타협하느라 꾹꾹 눌러 이루지 못한 꿈들이 아질아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모두가 사랑이었다고, 인생이란 따뜻한 거라고 노래하게 됩니다.
그 겨울의 찻집에서 모나리자를 불러보고, 추억 속의 재회를 꿈꾸며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노래로부터 갈피 모를 감정들이 뭉클뭉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심장이 뛰고 눈빛이 빛나며 사는 게 좋다는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거침없이 살고 사랑하고자 했던 우리 뜨거운 젊은 날이 황홀한 도취 속에서 살아나 노래가 되고 눈물이 되고 함성이 되는 거지요.
니체가 지적하듯 디오니소스적 격정의 본질은 망각, 완전한 망각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디오니소스적 격정이 고조되면서 주관적인 것은 완전한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구별이 해체되는 그 몰입과 망각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정화되는 시간, 너와 내가 화해하고 결합하는 시간입니다. 재산이나 지위나 신분이나 과거에 의해 격리된 너와 나의 높은 장벽이 허물어지는 그 광기의 시간 없이 어찌 인간이 이성의 질서에 숨 막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성의 억압 속에서 왜곡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디오니소스에 매료된 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랑하노라,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 자를. 음악의 신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기도 하지요? 꽃비가 내리는 이 화사한 봄밤에 잔을 들어보시지요. 디오니소스적 격정으로 미쳐본 자를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