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치겠다고?” 안강민 집 앞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2012년 5월 7일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첫 공판을 마치고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그는 18대 총선 공천 탈락에 대해 “정치의 쓴맛을 좀 봤지만 인생의 폭은 풍만해졌다”며 “(2003년 이후) 당 대표도 한 번 더 했고, 경남 양산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고 회상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8대 총선(4월 9일)을 40여 일 앞둔 2008년 2월 하순 어느 날, 지역구인 경남 남해-하동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던 박희태 의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당 공천심사위원 L이 전화를 걸어 공심위 분위기를 귀띔해 준 것. 그는 ‘설마 내가?’라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세상이 알다시피 그는 이명박 대통령(MB)이 박근혜 후보와 건곤일척의 대선후보 경선을 치를 때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MB, 이상득, 최시중, 김덕룡, 이재오와 함께 이른바 ‘6인 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18대 총선에서 6선 고지에 오르면 전반기 국회의장은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의 공천 기류에 이상신호가 감지된 것이다.
5선의 박희태는 무려 2시간가량 밖에서 기다렸다. 사법시험 기준으로 안강민은 11기나 아래였다. 새까만 후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박희태를 만난 안강민은 당황했다. 박희태가 설마 집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그 시점엔 안강민의 머릿속에도 ‘박희태 공천 탈락’ 카드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희태에게 공심위 내부 상황을 전한 L의 기억은 다르다. “안강민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박희태는 나이(70세)가 너무 많지 않으냐’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내가 전화로 얘기해줬습니다.”
어쨌건 안강민을 만난 박희태는 다시 지역구로 내려갔지만 공심위 안팎에선 심상치 않은 기류가 계속 이어졌다. 우선 민주당 박재승 공심위원장이 ‘비리 전력자 전원 탈락’ 방침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의 공천 개혁 부진을 지적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총선 판도까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안강민은 고심했다. 그는 잠시 ‘판관’ 역할을 맡은 객(客)이 아니었다. 대선후보 경선 때 후보검증위원장까지 맡았던 그였다.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너무 ‘피 튀기는’ 공방을 벌이자 두 후보를 각각 만나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누가 됐건 10년 좌파정권 종식을 위해서는 본선 경쟁력을 아껴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을 장악해야 이길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텃밭인 영남에서 공천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국면전환 카드인 셈이다. 영남은 어차피 누굴 내보내도 상관없는 곳 아닌가. 그 대신 소리를 내려면 제대로, 크게 내야 한다고 내심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본격적인 영남권 심사를 사흘 앞둔 3월 7일 박희태와 공천 경합을 벌이던 하영제 남해군수가 산림청장에 전격 임명됐다. 내부 여론조사에서는 하영제가 앞서고 있었다. 당시 친박(親朴)을 대변하던 강창희 공심위원(현 국회의장)은 뒷날 “나를 포함한 일부 위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며 흥분했다”고 털어놨다. 안강민도 뭔가 ‘야합’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하다.
박희태는 돌아가는 상황에 내심 불안했지만 영남 공천 전날인 12일 밤까지도 공천을 굳게 믿었다.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 공심위 간사인 정종복 사무부총장도 “이제 다 정리가 됐습니다. 축하합니다”라며 잇달아 전화를 걸어왔다. ‘당대표까지도 오케이하고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됐다고 하니 더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깐. 13일 지역구인 남해 바닷가 횟집에서 당원들과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있던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공심위가 자신을 포함해 친박계 좌장 격인 3선의 김무성 최고위원까지 현역 의원 25명을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언론도 ‘13일의 대학살’이라고 급보를 띄웠다.
안강민은 그날 오전 7시 반부터 친이(親李), 친박의 대리인인 이방호, 강창희와 비밀 회동을 가졌다. 영남권 공천 탈락자 명단을 최종 확인하는 자리였다. 대상자는 친이계 12명, 친박계 11명이었다.
안강민은 “(이 명단은)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안강민은 훗날 사석에서 “박희태 의원을 날린 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희태는 다시 서둘러 상경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사이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다. MB의 호출이었다.
MB=“비례대표는 어떻습니까.”
박희태=“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MB의 제안은 솔깃했다. 지역구 공천은 물 건너갔지만 비례대표를 알아서 챙겨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독대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작정한 듯 기다리고 있었다.
박재완=“무슨 얘기를 나누셨어요?”
박희태=“비례대표를 하라고 말씀하데요.”
박재완=“아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공천의 일관성이 없게 되는데….”
박희태=“내 형편이 어려워졌는데, 지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요.”
잠시 설전을 벌인 그는 기분이 나빴지만 일단 MB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MB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찌 됐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속은 타들어 갔다. 6인회 멤버인 최시중을 만나 하소연했다. 최시중은 즉석에서 MB에게 전화를 걸어 “박희태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라며 강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MB는 최시중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공천이 힘들다는 얘기만 했다.
비례대표 공천 발표를 나흘 앞둔 3월 20일 아침, 박희태는 이방호의 서울 자택을 찾아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이방호=“(어쩔 줄 몰라 하며) 부의장님, 전화라도 하시면 제가 (집으로) 올라오시라고 할 텐데 왜 여기서….”
박희태=“내 차에 타. 할 말이 있어서….”
그는 서울 여의도 당사로 가는 동안 하소연했다. “사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죄송하더라. 하지만 비례대표는 안 된다. 공천 탈락한 사람에게 어떻게 비례를 주나. 청와대에서도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었다. 배려를 하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해야지….” 이방호가 당시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한 얘기다.
공천이 마무리된 3월 하순 어느 날, MB는 박희태를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MB=“선거가 매우 어려운데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줬으면 합니다.”
박희태=“공천에서 떨어진 사람이 선대위원장을 하면 사람들이 웃을 겁니다.”
박희태는 내심 발끈하는 마음을 이같이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차마 대통령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혼자 하기는 부끄럽다”며 같이 공천에서 탈락한 김덕룡 의원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천거했다.
안강민도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박희태, 김덕룡 총선 선대위원장’안(案)을 제안했다. 류우익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박희태 학살’은 그만큼 부담이 컸다.
3월 30일 박희태는 결국 김덕룡과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상처는 깊었다. 그의 20년 정치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였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다시 만난 것이다.
첫 번째, 그러니까 꼭 15년 전 김영삼(YS) 정권이 출범할 때도 그랬다. 그는 재선의 당 대변인으로 공신 반열에 올랐다.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YS 정권의 초대 법무부 장관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검사 출신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길 꿈꾼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은 불과 9일. 인사검증 파동에 휘말려 낙마하고 말았다.
JP(김종필)는 정치를 속이 텅 빈 ‘허업(虛業)’이라고 했다. 예능 프로그램을 흉내 내 “박희태에게 정치란?”이라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래도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선거를 통해 6선 고지를 달성한 뒤 결국은 국회의장 자리에 올랐으니 ‘허업’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다시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라는 복병을 만나 국회의장에서 중도하차했으니 역시나 “정치는 허업”이라고 할까.
영남 물갈이는 그렇게 끝났지만 2008년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은 또 다른 고비를 맞는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의 서명’은 공천파동의 제2라운드이자 당내 권력 투쟁의 서막이었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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