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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핫이슈]승무원 폭행 사건으로 본 기내 서비스 심리학

입력 | 2013-04-27 03:00:00

컵라면, 끓인 컵라면, 가정식 라면… 하늘 위 계급사회




항공기는 작은 계급사회다. 그 사회가 굴러가도록 승무원은 소믈리에가 되거나 한복 패션모델이 되기도 하고 풍선 인형을 만드는 법도 익힌다. 승객들은 고시원보다 작은 공간에서도 퍽 대접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포스코에너지 임원이었던 A 씨는 왜 승무원을 못살게 굴었던 걸까. 평소 마음가짐이나 매너 같은 A 씨 본인의 문제도 있을 테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손찌검을 용인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A 씨를 비롯해 비행기 승객들이라면 누구나 여러 가지 물리적 심리적 압박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턱없이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신체의 자유가 구속당하고 상당한 수준의 진동과 소음에 시달린다. 소설가 김훈은 비행기 여행에 대해 “사람 묶어놓고 개밥 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해외여행의 흥분과 추락에 대한 공포는 마음에, 낮은 기압·습도와 시차는 몸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영향을 미친다.

기내 서비스는 이런 불편과 두려움에서 승객들의 눈을 돌리려는 항공사들의 필사적 노력이다. 공간과 음식 같은 한정된 자원을 승객들에게 배분하는 방식은 묘하게 지상의 계급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을 닮아 있다.



기내 라면 맛의 진실

라면 문제부터 시작해 보면, A 씨 사건에 따라다니던 뒷얘기 중 하나가 ‘기내 제공 라면은 기압이 낮은 상태로 끓이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아닌데, 비행기에서 먹는 라면이야말로 꿀맛인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 같은 항공사 비행기라도 좌석 등급에 따라 나오는 라면이 다르다. 대한항공에서는 일반석에는 신라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제공하며 비즈니스석에는 같은 컵라면 내용물을 전기포트에 끓여서 준다. 신라면 봉지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일등석 승객뿐이다. 단거리 노선에는 라면 서비스가 없고 중거리 노선에서는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에만 라면이 제공된다.

A 씨가 탔던 A380기의 기내 전력이 낮은 것도 맞고, 기내 기압이 낮아 라면 물이 지상에서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는다는 사실도 맞다. 영국항공은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낮은 기압에서도 최대한 지상에서와 같은 맛이 나게 하는 요리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는 사람의 미각과 후각이 낮은 기압에서 평소보다 둔해져 짠맛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라면 맛에 더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개인 차가 있다. 게다가 지상의 라면도 먹는 사람의 배가 부른 정도나 컨디션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고, 면발의 쫄깃한 정도나 국물의 농도에 대한 기호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걸 감안하면 “내가 비행기에서 라면을 몇 번 먹어봐서 아는데”라는 일반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기내에 매콤한 향이 퍼지면 여기저기서 “나도 달라”는 요청이 온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착안한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부터 기내용 김치찌개를 시범적으로 인천∼프랑크푸르트 노선에서 제공하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라 다른 노선으로도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호사를 누리는 기분’

간식인 라면에 기울이는 정성이 그 정도고, ‘본편’인 기내식에는 당연히 더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간다. 꼭 제주도의 목장에서 방목 생산한 명품 한우로 만든 일등석용 요리(대한항공)가 아니더라도 기내식은 대개 ‘내용에 비해 절차가 지나치게 호사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왜 항공사들이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간편한 음식 대신에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먹기 힘든 요리를 제공하는 걸까를 묻는다. 에코는 이에 대해 ‘승객으로 하여금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기분을 갖게 하려고’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답이지만 기내식의 최우선순위는 사실 맛이 아니라 위생이다. 격리된 공간인 항공기에서 집단 식중독이 생기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유가 쉽게 이해가 된다. 단체급식 부문에서 국내 최초로 HACCP(식품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 적용 업체로 지정된 곳이 바로 대한항공이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잘못된 기내식으로 탈이 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기장과 부기장은 언제나 서로 다른 메뉴로 식사를 한다.

다이어트식, 한식, 저염식, 생식이 나오는 등 호사스러움을 향한 경쟁은 날로 더해가고 있지만 20세기 전반에만 해도 기내식은 주로 샌드위치와 샐러드 등 차가운 음식 위주였다. 그러던 기내식 문화를 바꾼 것은 1950년대에 도입된 기내 오븐이다. 현재 대형 항공사는 대개 전문조리사를 두고 있으며 유명 레스토랑이나 요리사와 제휴를 해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현지화도 중요하다. 루프트한자는 한국 노선에는 비빔밥을 비롯한 한식 메뉴를, 일본 노선에는 사케와 매실주를, 인도 노선에는 차이티를 제공한다.

기내에서 먹는 음식은 운반비와 유지비를 포함해 지상의 음식점에서 파는 같은 메뉴보다 2∼3배 비싸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가격은 각 항공사의 영업비밀이지만 대략 비즈니스석의 경우 1인분에 4만∼5만 원, 일등석은 10만 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 위의 특급호텔, 아니 철저한 계급사회

널리 퍼져 있지만 잘못된 속설 중 하나가 ‘일반석 손님은 항공사에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만약 그렇다면 저가항공사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겼겠느냐”고 반문한다. 핀에어처럼 일등석 없이 비즈니스석과 일반석 등 두 클래스만 운영하는 회사도 있다. 그러나 일반석보다는 비즈니스석이, 그보다는 일등석 승객이 항공사 수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략 일등석과 일반석의 가격 차는 6∼9배에 이른다. 27일 출발 기준으로 대한항공 로스앤젤레스 노선 일등석(코스모스위트) 가격은 유류할증료와 세금을 포함해 1112만여 원, 가장 저렴한 조건의 일반석 가격은 195만여 원이다.

게다가 일등석 서비스는 품격과 역량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항공사로서는 어지간히 공을 들이는 게 아니다. ‘하늘 위의 특급호텔’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자체 재배한 무공해 농산물과 영국 찰스 왕세자가 보증한 유일한 명품 샴페인을 제공하거나(대한항공) 완전히 누워서 32인치 개인용 고화질 디스플레이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하는(아시아나항공) 등 식(食)과 주(住)의 문제에서 일등석 승객에 대한 대접은 남다르다.

지불한 돈에 따라 대놓고 접대를 차별하는 것은 배나 호텔도 마찬가지지만 비행기 같은 좁은 공간처럼 사람이 비교되는 곳은 없다. 뒤편 일반석의 내 자리를 찾아갈 때 먼저 들여보낸 비즈니스석 승객들이 여유 있게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펴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꼭 비즈니스석을 통과해야만 일반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는 어쩌면 잔인하기까지 하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각각 일반석과 비즈니스석으로 자리가 갈라지고 난 뒤 서로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경험담도 흔하다. 프리미엄석과 일반석에 대한 차별 대우는 심지어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라운지와 대기 열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사치재 마케팅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기존 고객의 과시욕을 충족시키고 잠재 고객의 구매욕을 자극하고자 하는 노림수도 깔려 있다.



과잉 친절? 여성 상품화?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임원 등 주요 승객 명단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관리하고 이들이 탔을 때 알은척을 해주는 ‘인지서비스’까지 하는 국내 항공사들의 서비스는 확실히 유별난 데가 있다. 국내 항공사들의 과잉 친절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러나 ‘깨진 유리창 법칙’의 저자이자 PR 전문가인 마이클 레빈은 “맛없는 기내식보다 웃지 않는 승무원이 더 나쁘다”고 단언한다. 이 점을 잘 파악한 항공사가 바로 기내식을 스낵으로 바꾸는 대신에 친절을 강화해 대성공을 거둔 미국의 제트블루사다. 기내에서 승무원들이 공연을 하거나 승객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며 친근한 느낌을 주려고 하는 국내 저가항공사들도 제트블루의 후예들이다.

국내 항공사들이 여성 승무원을 상품화한다는 지적도 오랜 비난거리다. 그러나 해외에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 라이언에어처럼 스튜어디스의 비키니 달력을 매년 내는 곳도 있다. 승무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이고 자선사업을 위한 것이란 명분을 내세우지만 ‘우리 항공사의 승무원 미모가 이 정도’라는 마케팅 효과도 거둔다.

최근 기내 서비스의 트렌드는 ‘소통 강화’다. 아시아나항공은 비행기 안에서 승객에게 손 편지를 쓰게 한 뒤 이를 정해진 시점에 수신인에게 전해주게 하거나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털모자 뜨기를 할 수 있게 한다. 승무원과 승객 간의 소통을 넘어 승객이 다른 친지나 지구 반대편 어려운 이들과 소통하게 한다는 취지에서다.

비행기 여행의 고수들은 비즈니스석과 일등석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요령에 대해 “그냥 처음부터 승무원에게 ‘내가 이용이 서투르니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게 낫다”고 조언한다. 어차피 서비스가 종류도 많고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데다 승무원으로서도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보다 도와달라는 승객에게 더 눈길이 가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최고의 비행기 여행은 스스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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