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미국 생활 접고 귀국
미국을 중심으로 후배 목회자 교육에 주력하다 10년 만에 영구 귀국한 박조준 목사. 그는 “한국 교회는 ‘큰 대(大)’자 좋아하는 성장주의와 감투를 좇는 명예욕에서 벗어나야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조준 목사(79)는 2003년 자신이 개척한 갈보리교회(경기 성남시 분당구) 담임목사 직에서 물러날 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이·취임식 다음 날인 그해 1월 6일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에 앞서 몇 개월 전 그는 당시 개신교 풍토에서는 드물게 조기 은퇴를 전격 선언했고, 이필재 목사가 후임 목사로 결정됐다. 그 과정이 너무 빨라 신자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버리고 가느냐”는 불만도 나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력개발원을 통해 목회자 교육에 주력하다 최근 귀국한 박 목사를 22일 만났다. 그는 부인이 향수병에 걸렸을 때 한 해 한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갈보리교회의 요청이 있었지만 축도를 한 것을 빼면 일절 설교도 하지 않았다. ‘귀양 아닌 귀양’ 10년이었다.
박 목사는 10년 만인 6월 2일 갈보리교회에서 두 차례 설교한다. 자신도 약속을 지켰고, 이 목사도 은퇴하기 때문에 이제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란다.
2002년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뒤 11년 만에 만난 그는 세월 탓인지 흰머리가 많이 늘고, 귀도 어두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개신교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박 목사는 1973년 38세 때 한경직 목사의 뒤를 이어 개신교 장자(長子)교회로 불리는 영락교회 담임목사가 되면서 개신교의 미래를 대표할 목회자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진보적인 사회적 발언과 열정적인 설교로 각광받던 그의 목회 인생은 1984년 외화밀반출 사건으로 큰 굴곡을 맞았다.
“1979년 제가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장례예배를 집전했어요. 그의 어머니가 영락교회 권사였죠. 차 실장 권유로 경호실 근무하던 전두환 씨를 위해 기도해 준 적도 있고…. 그 후 전두환 정권 때 대통령 미국 순방에 동행해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거절하다 1984년 사건이 터진 거죠.”
그는 초교파교회로 신앙과 평신도 중심의 새 교회를 만들자는 꿈이 담긴 갈보리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의 영구 귀국으로 갈보리교회가 영향을 받을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후임 목사는 교회 내 청빙위원회가 결정할 것”이라며 “남은 생은 후배 목회자들의 교육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일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습과 성장주의 풍토가 바뀌지 않는다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목사가 심부름꾼이지 왕이 아니지 않습니까. 몇몇 목사는 보디가드도 있던데 이게 말이 됩니까? 큰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는 목사는 실패자라는 인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가면 ‘당신, 큰 교회 하다 왔느냐’고 물을 것 같습니까?”
● 박조준 목사는
―서울대 문리대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졸업
―1973년 서울 영락교회 담임목사
―1985년 갈보리교회 창립
―2003년 갈보리교회 담임목사직에서 물러남
―현 세계지도력개발원(Global Christian Leadership Institute)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