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득 KNN 해설위원이 25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SK-롯데전 시작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경남 지역방송 KNN에서 롯데의 시즌 전 경기를 생중계하는 이 위원은 부산 팬들의 야구 궁금증을 풀어주는 주인공이다. 사직|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 2000경기 중계 KNN 해설위원 이성득
‘전국노래자랑’은 송해다. ‘가요무대’는 김동건이다. 이들이 없다고 프로그램 진행이 불가능할 일은 없다. 다만 그 특유의 ‘맛’이 사라질 터. 이런 기준을 적용해 롯데 야구의 중계를 논하자면 이성득(60) KNN 해설위원이 바로 떠오른다. 부산·경남 지역방송 KNN에서 이 위원은 롯데의 시즌 전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다. 1998년 후반기부터 중계를 시작한 이래 16시즌째다. 이 위원은 롯데의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중계를 마친 뒤 경기기록지를 꼬박꼬박 모아왔다. 그것이 27일 잠실 LG전에서 2000장째가 됐다. 이 위원은 “올 시즌부터 (롯데 경기가 없으면) NC 경기 해설도 한다. 그래서 2000경기가 더 빨라졌다”며 웃었다.
난 원년 선수·프런트 등 거친 골수 롯데맨
16년째 마이크만 잡으면 나도 모르게 흥분
가슴 아픈 순간은 故 임수혁이 쓰러졌을때
3000경기 목표…우승은 보고 그만둬야지
○종합야구인에서 해설자로!
-어떻게 해설가가 됐나?
“KNN 라디오가 1998년 창립됐다. 창사 직후 야구해설가는 롯데 선수 출신인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입담은 좋은데,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방송국에서 안 되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생각도 못했는데 제의가 왔고, ‘시험’을 쳐서 후반기부터 해설로 데뷔했다.”
(입사시험은 롯데 경기 녹화화면을 틀어놓고 방송사 간부진 앞에서 해설을 하는 식이었다. 당시 이 위원의 첫 파트너는 임경진 전 MBC 아나운서였다. 권성욱 KBSN 캐스터가 뒤를 이었고, 현승훈 KNN 아나운서와는 10년을 같이 했다. 올 시즌부터는 현 아나운서 외에 이현동 신입 캐스터와도 호흡을 맞추고 있다.)
“경남중·고를 나온 부산 토박이다. 1977년 고려대 졸업 후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당시 김응룡 감독(현 한화 감독)이 계셨다. 군 제대 후 1981년 한일은행에 다시 들어갔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고, 고향팀 롯데로 갔다. 은행원으로 남을까, 체육교사가 될까, 프로선수가 될까 고민하다 롯데를 택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선수 이성득은 1982년 1년만 뛰고 은퇴했다. 고질인 무릎 통증이 악화된 탓이다. 무릎이 아픈 사실을 알면서도 은행을 버리고 택한 롯데 유니폼이었다. 현역 시절 이 위원의 보직은 2루수와 3루수, 유격수를 다 맡을 수 있는 유틸리티맨이었다.)
-은퇴 후에는 뭘 했나?
“1983년부터 프런트로 일했다. 당시만 해도 실무직원이 4명인 시절이라, 별 걸 다해야 했다. 롯데가 구덕구장에서 야구할 때인데, 나는 티켓을 관리했다. 당시 구덕에 9000명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사람이 정말 많이 왔다. 입장료를 현찰로 받으면, 주말에 쌓인 그 돈 보따리를 들고 월요일 아침에 은행에 가는 것도 내 일이었다. 내가 보따리 들고 튀었으면 큰 일 났을 것이다.(웃음)”
“당시 롯데 전무가 나를 좋게 봐준 덕분이었다. 야구 얘기를 물어보면 잘 말해주니까 괜찮다고 봤나 보다. 2군 코치를 2년간 했는데, 당시 2군에는 코치가 2명이었다. 투수코치만 따로 있었지, 내가 감독 겸 타격코치 겸 수비코치였다.”
(2군 버스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야수가 모자라서 투수로 라인업을 채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투수를 타자로 세웠는데, 거기서 ‘대박’이 터졌다. 김응국(현 롯데 타격코치)이었다. 타격 소질이 몹시 좋아 보여서 당시 1군에 추천했다. 원래 김응국은 시즌 후 방출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 위원은 “김응국을 10경기만 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1군에 올라간 김응국은 그 10경기에서 3할을 쳤고, 이후 김응국은 롯데의 핵심타자로 성장해 1992년 우승의 주역이 됐다. 김응국은 이 위원 코치 인생의 훈장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2년이 코치로서 끝이었다.
“감독이 바뀌면 코치진은 물갈이 되는 것 아니겠나. 다시 프런트가 됐다. 원정경기 전력분석원으로 그만둘 때까지 일했다.”
○편파 해설의 시초!
-선수, 프런트, 코치, 전력분석원을 거쳤기에 해설할 때 도움을 받았겠다.
“말을 많이 하려면 자신감이 중요했다. 처음에 불안했는데, 임경진 아나운서가 ‘코치 때 이야기하듯 해주세요’라고 조언해준 게 도움이 됐다.”
-그래도 실수가 많았을 텐데.
“부산 출신에다 롯데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다 보니, 방송 중에 ‘우리 롯데’라는 말도 쓰고 그랬다. 야구 속어가 일본어인데, 입에 배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도 나왔고.”
-편파 해설 원조라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공정하게 해설했더라면, 다른 이야기 안 듣고 지냈을 거다. 방송사에서 편파로 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롯데에 애정이 많다. 해설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롯데 쪽으로 가고, 흥분하면 샤우팅으로 소리도 지르게 되더라. 그걸 또 부산 팬들이 좋아하니까, 탄력을 더 받고.”
-공교롭게도 이 위원이 해설을 맡고 나서 롯데가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
“2000경기 16년째인데…. 내 꿈이 3000경기까지 중계하는 것이다. 한국의 빈 스컬리(LA 다저스 전속 캐스터)처럼 되고 싶다. 롯데 우승을 한번은 보고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바람이다.”
-우승의 기다림이 이렇게 길 줄 몰랐겠다.
“처음에야 ‘조만간 우승 한번 하겠다’ 했지. 시작했을 때 성적이 안 좋았으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했을 텐데, 그래도 2000년까지는 괜찮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승)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2001년부터 순위가 ‘8888577’이더라. 계속 지니까 너무 속상해 위장병까지 났다. 시즌만 마치면 두 달간 약을 먹어야 했다. 김명성 전 감독이 돌아가시거나, 임수혁이 쓰러졌을 때도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애정 어린 독설가!
-2008년 로이스터 감독이 와서 롯데가 달라졌다. 그러나 이 위원은 로이스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 같다.
“로이스터는 롯데 팬들한테는 영웅이다. 나 역시도 재임 중에 포스트시즌까지 올라간 건 인정한다. 로이스터에 관한 책도 썼고, 책 선물도 해줬다. 다만 큰 틀은 좋았지만, 세밀한 야구가 아쉬웠다.”
(이 위원은 로이스터가 물러나고 양승호 감독이 취임한 직후인 2011년 4월이 해설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라고 했다. 일부 팬들이 ‘왜 로이스터에게 했던 것만큼 양 감독을 비판하지 않느냐’고 했기 때문이다. 방송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성적이 좋아지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만류했고, 실제 양 감독이 5월 이후 좋을 성적을 내면서 상황도 호전됐다.)
-현재 김시진 감독은 어떻게 보나?
“넥센에서도 선수가 없어 고생했는데, 운이 없는 감독 같다. 운이 내년쯤에는 돌아올 것 같다. 지금 쓴 맛을 보고 있는데, 참아내야 내년에는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롯데 구단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당장 우승을 하라’고 말만 하지 말고, (우승할 전력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 위원은 시즌 때는 전국 야구장에서, 비시즌 때는 산에서 산다. 겨울 산에서 시즌을 보낼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16년간 해설을 하면서 그는 해운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롯데 야구와 살다 보니 가족도 뒷전이 됐다.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이 위원은 “부산·경남 위주지만, 가끔 타지 사람이 내 방송을 듣는 것 같더라. 개중엔 방송국에 ‘나는 타 팀 팬인데 듣기 불편하다’는 글을 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롯데 팬들이 원하는 한, 나는 계속 편파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트위터@matsri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