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그가 속한 ‘신플레미시연대(NVA)’ 정당 홈페이지의 ‘정치용어’ 코너엔 ‘와플 틀 정치(waffle iron politics)’라는 말이 올라 있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벨기에 북부의 플레미시 지역에서 가령 항만 공사에 정부 예산 10억 유로를 쓴다 치면,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의 왈로니아 지역에도 도로 공사든 뭐든 10억 유로를 줘야만 하는 벨기에의 고질병이란다. 와플 틀에서 똑같은 와플을 찍어 내듯 억지로 지역 균형 정책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재정적자가 늘고 남부보다 잘사는 자신들의 납세 부담도 커진다고 북부 사람들은 불만이 대단하다. 2010년 6월 총선 뒤 541일간이나 연립정부 구성을 못하고 세계 최장 무정부 상태를 기록한 것도 결국 세금과 분배를 둘러싼 지역갈등 때문이었다.
이달 초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한 ‘버진아일랜드 은닉 재산 명단’은 벨기에도 비켜 가지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으로 지탱하다 프랑스에 팔린 BNP파리바 포르티스 은행부터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거래상까지 100여 개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뭔가를 숨겼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부패 척결의 책임을 진 국무장관 존 크롬베는 즉각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유럽연합(EU)은 역내 은행의 비밀주의를 제거해 탈세와 조세회피를 원천 봉쇄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벨기에 국세청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그런 기업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거다.
우리나라 국세청이 ICIJ에 한국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뒤 “명단이 입수되면 철저히 조사할 방침”이라며 사실상 손놓고 있는 것과 많이 닮았다. 검찰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조카가 버진아일랜드에 세운 페이퍼컴퍼니 계좌에 250만 달러가 남아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명단 중 일부를 세무 관료들만 모른다는 얘기다.
탈세와 부패는 세금만큼 오래된 인간사회의 관행이고, 정치권은 늘 부르르 끓다가 식는 것이 생리일 수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다 최근 브뤼셀로 돌아온 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유럽 정치인들은 늘 탈세를 뿌리 뽑겠다고 와플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서민을 족치면 탈세가 근절될까. 벨기에와 프랑스 네덜란드를 비교한 벨기에 경제학자 마티외 르페브르는 “돈과 권력이 많을수록 탈세도 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가장 못사는 벨기에 남부 사람들이 ‘그들’의 탈세를 알게 되면 자기들도 탈세에 나선다는 거다.
공정한 세무행정 못지않게 고위 공직자의 모범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정부는 탈세가 드러나니까 인사청문회 직전 허겁지겁 세금 낸 사람들을 버젓이 장관에 앉힘으로써 국민에게 치명적 신호를 보냈다. 민주당은 이런 장관들 때문에 “4+2(병역기피·탈세·부동산투기·위장전입+논문표절·전관예우), 부비부비(부정비리)가 고유명사가 됐다”고 했다.
벨기에 정부도 부족한 예산 28억 유로를 쥐어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올 초엔 파비올라 대비가 자선재단 설립 계획을 밝히자 엘리오 디뤼포 총리는 “상속세 탈세 가능성이 있다”며 왕실 연금 삭감을 강행해 결국 재단 설립을 포기시켰다. 우리 국세청 관세청처럼 힘 있고 백 있는 분들은 안 잡고 못 잡고 있다가 “400달러 이상 신용카드 해외 결제 시엔 꼼꼼히 따져보겠다”며 국민을 쥐 잡듯 몰아치는 처사는 치사하다.
EU가 역외 탈세 근절을 강조하는 것도 유럽 정치권의 와플과 부비부비에 분노한 시선을 딴 데로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여 썩 개운치 않다. 브뤼셀의 유럽저널리즘센터 부근 슈만 전철역에서 헤매는 내게 길을 가르쳐 준 신시아 할머니는 맞은편 EU 집행위원회 빌딩을 가리키며 말했다. “EU 관료들이 저렇게 득실대니 우리 세금이 자꾸 오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