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意 저버리고 정치인이 설계 간섭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최악의 건축’ 목록 상위권을 차지한 것은 필자에게는 다소 의외였다. 두 건물이 ‘최고의 건축’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건축’ 목록의 상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큼 쌍벽을 이룰 건물들도 아니다. 그런 두 건물이 나란히 비슷한 순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회의사당 신축은 우리 건축의 정체성을 담아야 하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시작됐다. 광복 후 변변한 자신의 건물을 갖지 못했던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가질 기회가 있었지만, 5·16으로 기회를 잃었다.
그런데 최고의 의사당 건물을 갖고 싶었던 국회에서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하나의 안을 내놓는다면 최고의 건축이 될 것이라는 결정이었다. 몇몇 건축가들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많은 건축가들은 국회 결정에 따랐다. 결과적으로 현상공모를 통해 당선안을 뽑지 않고 여러 건축가들이 공동 안을 만들어내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최초의 안이 결정된 후에도 국회의 설계 간섭이 계속되었고 결국 없던 돔을 얹어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국회는 건축주로서 주인 된 권리를 행사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국회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은 망각한 듯했다. 건축가들 역시 의욕은 충만했지만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광복 후 첫 의사당에 우리의 정체성을 담고자 했던 의지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정치인들은 자신의 짧은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자신들의 뜻을 적극 개입시킨 결과가 오늘의 국회의사당(1975년)이다.
행정부 수반이 일하는 집무실을 전통건축양식으로 짓는 것 역시 국회의사당에 우리의 고유문화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만큼이나 당연하게 요구되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디자인을 제시했지만 무시되었고,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청와대의 건설에는 건축역사학자들도 적극 개입해 업무공간으로는 처음으로 전통건축의 모습을 가진 현대 한옥이 만들어졌다. 그 한옥이 최악의 건물에 선정된 것이다.
정권유지를 위해 건축을 도구로 사용했던 우리의 현대사가 있었다. 남북분단의 냉전체제는 역사 속 전적지 부활의 배경이었고, 전적지의 사당에 세워진 계란색 단청의 콘크리트 한옥을 정당화했으며, 남북대화는 세종문화회관을 낳았다. 모더니즘에 심취했던 건축가들은 이러한 콘크리트 한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도 않았다.
건축을 처음 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건축가는 의사 변호사와 함께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전문가이자 자유업이라고. 그리고 ‘건축은 사회의 거울’이며, 그 중심에 건축가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용자를 위한 건축을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이러한 가르침은 건축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이들에게 건축가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만, 현실 속의 건축가는 전혀 달랐다. 그 결과가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건축이고, 건축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문가들이 스스로 내린 최악의 건축 순위 속에 담겨 있다. 이 두 건물은 건축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