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식 씨가 납북된 동생 경식 씨의 사진을 보며 동생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이 사진은 중식 씨가 갖고 있는 동생의 마지막 사진이다. 군산=이훈구 기자 ufo@donga.com
1967년 6월 납북되기 직전에 촬영된 풍복호. 출항 전 배를 수리하는 선원들 가운데 납북된 문경식 씨와 선장 최원모씨가 포함돼 있다. 납북자가족모임 제공
1966년 10월 군에서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식 씨의 걸음은 무거웠다. 작은 어선의 선장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가 입대하기 직전인 196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가장이 돼야 할 형은 도박으로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탕진하고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동생 경식 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1년 가까이 동네를 떠돌고 있었다. 영특했던 경식 씨를 아깝게 여긴 중학교 선생님들이 장학금을 받도록 도왔지만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경식 씨는 가까스로 잡은 진학 기회도 포기해야 했다. 가족을 나락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부담에 중식 씨는 방황하는 동생을 뒤로 하고 일용직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났다.
이듬해 6월 중순. 어머니와 동생이 몇 달 지낼 수 있을 만큼의 생활비를 번 중식 씨가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 동생은 없었다. 이웃에 수소문한 끝에 중식 씨는 동생이 ‘풍복호’를 타고 조기잡이에 나섰다가 소식이 끊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풍복호의 선장 최원모 씨(당시 57세)의 집으로 달려갔다.
“경식이가 북으로 끌려간 것 같아.” 풍복호 선장의 부인 김애란 씨(당시 45세·사망)는 중식 씨의 손을 잡고 동생의 납북 소식을 알렸다. 당시 경식 씨의 나이는 16세. 풍복호 선장 최 씨는 어린 경식 씨를 배에 태우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학비를 벌겠다”며 사정하는 경식 씨를 외면하지 못했다. 동생의 첫 출항은 1967년 6월 4일. 하지만 출항 다음 날 아침 풍복호는 연평도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37척의 다른 어선들과 함께 북한 경비정에 납치됐다.
하지만 풍복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풍복호의 선장 최원모 씨가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대북(對北) 첩보 활동을 벌였던 켈로부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북한이 문제 삼고 나선 것. 북한은 최 씨가 켈로부대 소속 ‘북진호’의 함장이었으며 북한군을 사살한 전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풍복호 선원 일부를 억류했다. 경식 씨와 함께 북한에 납치됐다 돌아온 한 어부가 중식 씨와 그의 어머니를 찾아와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닻을 올리고 배가 북한을 떠나려는데 경식이가 숨을 헐떡대며 부둣가로 뛰어 나왔어요. 뒤늦게 다른 배들이 떠나는 걸 알았나 봐요. 우리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북한군의 제지를 받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울며 발을 동동 굴렀는데…. 미안합니다. 배를 돌리지는 못했어요.”
간첩 가족 의심 속에 지낸 30여년
1960년대 말은 남북 관계가 최악을 향해 치닫던 때였다. 경식 씨가 납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1월 21일에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간첩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에 침투하려다 발각된 1·21사태가 일어났다. 동생을 잃은 상처를 추스르기도 전에 중식 씨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악몽이 시작됐다. 북한이 수시로 간첩과 공작원을 남파해 무력도발을 벌이자 정부는 납북어부 가족들을 남파간첩들의 선동에 회유될 수 있는 잠재적 ‘불순분자’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경식 씨와 함께 풍복호에 타고 있다 납치됐던 어부 중 한 명이 북한의 교육을 받고 간첩이 돼 침투했다가 붙잡힌 1970년 이후 중식 씨 가족에 대한 정부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1975년 여름 조업에 나섰던 중식 씨는 밀물 때를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통금시간을 넘겨 귀항했다. 항구에 나와 있던 경찰들은 중식 씨를 지하 조사실로 데려갔다. 수사관은 왜 자정을 넘길 때까지 회황하지 못했는지, 당시 인근에 나타난 간첩과 접선한 적이 있는지 등을 캐물었다. 세 시간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중식 씨는 쑥대밭이 된 집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중식 씨가 조사를 받던 중 완전무장을 한 경찰 기동타격대가 노모와 어린 자녀들이 자고 있던 집에 들이 닥쳐 세간 살림을 뒤집어 놓고 돌아간 것.
중식 씨 가족은 의심의 눈초리를 조금이라도 줄여볼 생각에 고향집을 팔고 군 부대 담장 너머에 집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는 연좌제의 그물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1989년 연좌제가 공식 폐지된 뒤에도 중식 씨의 숨죽인 삶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동생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에 납북자 가족이 포함된 2000년부터.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나이 많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줬기 때문에 젊은 축에 속하던 중식 씨는 항상 뒤쪽으로 순위가 밀렸다. 그나마 2010년을 마지막으로 이산가족 상봉마저 중단돼 언젠가 동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중식 씨의 기대마저 꺾였다.
희망, 놓을 수 없어 더 힘겨운
2011년 10월, 중식 씨의 전화가 울렸다. 동생과 함께 납북됐던 최원모 씨의 아들 최성용 씨(납북자가족모임 대표)였다. 납북자 국내 송환운동을 벌이던 중 정보원을 통해 입수한 평양시민 신상자료에 경식 씨를 비롯한 납북어부 10명이 포함돼 있는 걸 확인했다는 연락이었다. 중식 씨는 최 대표가 갖고 온 문서를 살폈다.
“문경식. 1951년 3월생. 혈액형 A형. 고향 전북 군산시 조촌동….”
문서에 따르면 경식 씨는 1977년 결혼해 현재 노동당원들이 주로 거주하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팔골동에 살고 있었다. 경식 씨는 공작원을 교육하는 조선노동당 112연락소의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40여 년 만에 중식 씨에게 도착한 동생의 근황….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정부도 문서의 진위를 확인해주지 못했다. 다시 끝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형님, 우리 유엔에라도 가봅시다.” 지난해 10월 최 대표는 중식 씨에게 스위스 제네바행을 제안했다. 유엔을 통해 풍복호 선장 최원모 씨와 경식 씨의 생사확인을 요청해보자는 것이었다. 40년 가까운 뱃일에 허리를 다친 중식 씨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2시간이 넘는 비행기 여행 끝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세 번에 걸쳐 유엔의 문을 두드린 뒤에야 중식 씨 일행은 북한에 경식 씨와 최원모 씨의 생사확인을 요청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 후 6개월 반. 중식 씨의 기다림은 이제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요즘 그는 아예 TV를 켜지 않는다. 뉴스에서 개성공단 잠정 폐쇄, 미사일 발사 위협 등 높아져 가는 남북갈등 소식이 나올 때마다 곧 동생의 소식이 도착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중식 씨는 동생의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구김이 가득한 흐릿한 흑백사진 속에는 지금은 60대가 됐을 까까머리 동생이 웃고 있다. 납북됐을 때 10장 남짓 남아있던 동생의 사진은 26년 전 세상을 뜬 어머니의 눈물로 모두 못 쓰게 됐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사진 속 동생 얼굴을 쓰다듬던 중식 씨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빚을 얻어서라도 동생을 가르치지 못한 내가 죄인이지요. 송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동생에게 죽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고 싶어요.”
군산=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