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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사직서 쓰는 아침’

입력 | 2013-05-04 03:00:00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1964∼)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같은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화가 사석원 씨의 벽화 ‘선물’.

언젠가 전윤호 시인은 1991년 등단 이후 가장 열띤 관심을 이끌어 낸 작품이 ‘사직서 쓰는 아침’이라고 자평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과 생계를 잇는 일 사이에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만큼 호기롭게 사표를 던져 보고 싶은 로망이 무럭무럭 커 가기 때문인가. 자신의 경험을 대중의 공감대에 녹여 낸 시인은 또 이렇게 들려준다. “위로하자면 일탈을 꿈꾸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일탈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시간만 때우며 사는 사람은 몸에 경보기가 꺼져 있다.”

대기업 임원이 기내에서 트집 부린 것을 놓고 좁은 사회(社會)가 발칵 뒤집어지고, 투명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비정규직의 비애를 슬프도록 코믹하게 풀어 낸 TV드라마에 와글와글 쏟아지는 반응을 보며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에 대한 감정이입에는 조직 생활에서의 불화로 인한 고민과 수모의 경험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

찰리 채플린의 오래된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가. 실제 우리가 겪는 직장 드라마는 희극이면서 비극을 이루고, 또 비극이다가 결국 희극이 된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보낸 좁은 회사(會社)의 나날도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그때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누구 인생은 술술 풀리는 듯 보이고 누구 인생은 배배 꼬인 듯 보여도 각기 할당 받은 배역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저리하다 어느 날 시원 혹은 섭섭하게 직장과 작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때까진 사직서를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 아침에 이 시를 떠올리면 좋겠다. 나 혼자만 고군분투하는 게 아님을 깨닫는 일도 선택에 도움을 준다.

인기 화가 사석원 씨가 즐겨 그리는 당나귀는 머슴처럼 살아가는 직장인의 표상처럼 다가온다. 그는 “어마어마한 짐들을 싣고 다니는 그 다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가늘어서 그저 더욱 애처롭게만 보인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서울 방배동 어느 회사의 사옥에 그가 그린 벽화 ‘선물’에 등장한 당나귀는 한 아름 꽃을 등에 지고 간다. 등골이 휘어질 듯한 무게에도 당나귀는 그 향기를 음미하는 듯 참 편안한 얼굴이다.

근로자의 날로 막 오른 5월, 한 주 무사히 잘 견뎌 내고 선물 받은 토요일. 이 주말 지나 출근할 일터가 고역인 분들은 출근할 일터가 없어 고통인 분들 심정을 헤아려 볼 일이다. “(회사의) 노예 한 번 돼 보고 싶어서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드라마 속 대사처럼 사직서를 쓸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사치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