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자원봉사자와 BMW의 조합. 이 모습은 도로를 메운 앰뷸런스와 가설 천막, 계속되는 여진의 풍경과 묘한 부조화를 이뤘다. 자원봉사자와 재난 현장의 기묘한 동거는 루산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1만 명 이상의 젊은 자원봉사자가 운집해 있었지만 대부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낮에는 어슬렁거리고,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 놀았다.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유휴인력으로 전락한 이유는 당국이 원치 않아서다. 정부는 군 병력과 자체 구호조직만으로 현장 지원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봉사대를 결성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현 소재지에 이재민보다 자원봉사자가 많아지자 당국이 해산을 종용하기도 했다. 5년 전 원촨(汶川) 대지진 초기에 봉사 인력 부족으로 애를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들이 루산에 몰려든 건 인도주의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것뿐일까. 할 일이 없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은 채 밤새도록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된 재난 현장에서 일종의 해방구를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최소한의 질서만 유지되는 곳에서 아스팔트를 점유한 채 사회주의 정치 체제에서 통제되어 온 젊음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갇혀 있던 욕구가 오프라인으로 분출된 건 이번뿐이 아니다. 지난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으로 중국 도심을 메운 시위대는 ‘펀칭(憤靑)’, 이른바 분노한 청년들이었다. 당시 베이징(北京)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학생들은 “저장(浙江) 성에서 꼬박 하루를 기차 타고 올라왔다”며 “일본이 싫기도 하지만 시위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때 베이징대 1학년이었다는 한 지인은 “우리는 실패한 세대다. 다시는 도로로 못 나간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젊은이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1월 난팡(南方)주말 사태에서 보듯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응집력은 여전히 떨어진다. 하지만 외부를 향해 뭔가 말하고 싶어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다. 시진핑(習近平) 시대 들어 일부 통제가 완화되고 있는 것은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 폭발해버리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태 이후 민족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란 바링허우(八零後·1980년대 출생자)들은 서구를 동경하면서도 중화주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세대다. 국가와 민족적 이익이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해댄다. 티베트에서 120명 가까이 분신했다고 말해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언론에서 보도를 전혀 안 한다”며 놀란다. 그러다가도 다른 나라가 티베트 분신 사태를 우려하면 “왜 내정 간섭하느냐”고 반발한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