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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러운 다문화 자녀들] 인종차별 방지 장치가 없다

입력 | 2013-05-07 03:00:00

인종차별금지법 없는 한국… 비하 욕설도 벌금 100만원 ‘끝’




다문화 어린이들 “정보통신기술 신기해요” ‘리틀 싸이’ 황민우 군에 대한 온라인 악플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숨어있는 인종차별적 시각을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6일 SK텔레콤 초청으로 서울 중구 을지로 정보통신기술 체험관 ‘티움’을 방문한 ‘지구촌 학교’의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정보통신기술을 체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누리꾼 10여 명으로부터 사이버테러를 당한 ‘리틀 싸이’ 황민우 군(8).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등장했다가 유명해진 뒤 신곡 ‘젠틀맨’의 패러디 뮤직비디오까지 찍어 큰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황 군은 악플 탓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잡종’ ‘뿌리부터 쓰레기’라는 댓글이 올라왔다는 걸 알고는 의기소침해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황 군의 소속사는 8, 9일경 서울 강남경찰서에 악플을 올린 누리꾼들을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할 예정이다.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없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려는 것이다.

다문화 인구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현행법은 이들의 인격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인종차별금지법이 없는 현행법 체계에서 황 군을 향해 악플을 날린 누리꾼에게는 모욕죄 정도만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모욕죄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당사자에게 모욕감을 줬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명예훼손보다 처벌이 가볍다. 게다가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성립하는 친고죄다. 국내에선 동남아시아인이나 중국동포(조선족) 등의 외국인 노동자가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고소했다가 일자리마저 잃을 것을 우려해 법에 호소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기소는 2009년 처음 이뤄졌다. 인도에서 온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연구교수(31)는 2009년 7월 버스 안에서 한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다 30대 회사원에게서 “시끄러워, 더러운 ××야! 너 어디서 왔어?” “냄새나는 ××, 너 아랍에서 왔어?”라는 욕설을 들었다. 후세인 교수는 그 회사원을 경찰에 고소했고 회사원은 모욕죄로 약식 기소돼 벌금 100만 원 형을 받았다. 이후에는 인종차별이 모욕죄로 처벌된 사례가 거의 없다. 황 군이 당한 경우처럼 미성숙한 사회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공공연히 인종차별적 언행을 자행하고 있지만 법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보다 일찍 다문화사회가 정착된 선진국에선 인종차별을 엄격히 처벌한다. 영국인 선원 윌리엄 블라이싱(41)은 지난해 10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퀸스파크레인저스(QPR)와 에버턴의 경기를 관람하면서 박지성에게 “칭크(chink·‘찢어진 눈’이란 뜻으로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를 쓰러뜨려!”, 나이지리아인 빅토르 아니체베(에버턴)에겐 “저 망할 검은 원숭이!”라고 소리쳤다. 이를 들은 관중 두 명이 블라이싱을 경기장 관계자에게 신고했고, 블라이싱은 유죄로 기소돼 벌금 2500파운드(약 426만 원)와 함께 축구장 출입을 금지당했다. 영국은 1965년 인종차별금지법을 만들었고, 2010년엔 인종 성별 장애 임금 등 각종 차별금지법을 통합한 ‘평등법’을 통해 차별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국내에선 2007년 법무부가 처음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한 이래 차별 금지를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인종뿐 아니라 성별, 장애, 나이, 종교, 사상, 성적 취향 등까지 포괄적으로 다뤄 각계의 반대에 부닥쳤다. 주로 동성애에 반발하는 종교계의 반발이 컸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인에 대한 인격 모독을 모욕죄만으로 처벌하기엔 법률상 문제가 많다”며 “유색인종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처벌하는 차별금지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 현실 못지않게 시민의식도 성숙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지성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외국에서 차별받은 데 분노하면서도 정작 국내에서 뛰고 있는 흑인 선수들에게는 쉽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는 게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소사(KIA) 리즈(LG) 바티스타(한화·이상 도미니카공화국) 등 흑인 외국인 투수가 선발 등판하는 날엔 관중석에서 “오늘 선발은 검OO” “검OO가 탄력이 좋다”는 식으로 이들의 피부색을 조롱하는 인종차별적 발언이 터져 나온다. 인터넷에서 이들을 비하하는 글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조동주·김수연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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