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8일 어버이날… 이마트 은평점 근무 20명이 털어놓은 ‘일하는 엄마’

입력 | 2013-05-08 03:00:00

“능력 맘 자부심 날 웃게 하고 가족들 배려가 날 춤추게 해”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이마트 은평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어머니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힘들어도 내 세상이 있어 좋다”는 이들은 우리 시대 ‘일하는 엄마’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줬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문모 씨(47·여)는 결혼 전 작은 회사에서 경리로 일했다. 결혼 후 그만뒀지만 남편 혼자 일해서는 아이 3명을 키우기 힘들었다. 학원에서 15인승 통학차량을 운행하는 남편의 벌이가 나쁘지 않을 때는 그래도 버틸 만했다. 하지만 남편의 벌이가 점점 나빠지자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5년 전 막내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그의 취업을 두고 회의를 열었다. “엄마가 없어도 괜찮겠느냐”는 말에 아이들은 흔쾌히 “괜찮아, 엄마 일하는 거 찬성”이라고 답했다. 고마웠다. 일하는 엄마를 응원해준 가족 덕에 그는 다시 ‘월급’을 받게 됐다.

지난해 4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5.9%로 전 연령별 여성 경제활동참가율 중 가장 높았다. 주부보다 일하는 엄마가 더 자연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일하는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서울 은평구 이마트 은평점에서 계산 업무를 하는 엄마 20명을 인터뷰했다.

○ 돈 버는 엄마가 능력 있는 엄마

제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엄마들이지만 일을 시작한 이유는 같았다. 자녀 학원비를 보태고 가계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다. 아이들에게 교육이며 먹는 것 모두 더 잘 챙겨주고 싶어서 2004년 일을 시작한 김연숙 씨(46). 두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엄마 손이 덜 가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살림하는 거야 거기서 거긴데 집에 있으면 잠이나 자고 도태되는 것 같다”며 “몸이 좀 안 좋은 날도 일하러 나오면 없던 활력이 생겨 좋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일을 택한 엄마들이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자부심은 이들에게 돈 못지않게 소중하다. 강은숙 씨(48)는 “예전처럼 사고 싶어도 못 사는 게 없어서 좋다”고 말한다. 가전제품처럼 비싼 물건은 꼭 남편과 상의해야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과감하게 산다는 것.

김혜영 씨(42)는 친정어머니에게 매달 50만 원씩 용돈을 보낸다. 성과금이나 보너스를 받으면 통 크게 절반을 떼어 남편에게 “쓰라”고 건넨다. 일하는 걸 반대하며 “얼마나 버티나 두고 보자”던 남편도 이젠 아내에게서 받은 용돈을 주변에 자랑한다. 정효숙 씨(48)도 “사달라는 물건을 척척 사주니 아이들이 ‘엄마가 쿨해졌다’고 좋아한다”며 웃었다.

김연숙 씨는 “요즘은 아이들도 원하는 것, 필요한 것 다 해주는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아이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며 “그렇지 못하면 괜한 짜증이 늘어 아이들과의 충돌도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한다는 자부심도 크다. 이덕미 씨(48)는 “회사에서 가족 경조사를 챙겨줄 때 ‘내가 한 사회에 소속돼 있구나’ 싶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왕임 씨(49)는 “이름 석 자를 불러주는 것도 참 좋다”며 “사회에 나와 일하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웃었다. 우울증이 심해져 일을 시작했다는 강 씨는 “삶이 180도까지는 아니어도 130도 정도는 바뀐 것 같다”며 “내성적이던 성격이 많이 변했고 친구 같은 동료들과 남편 험담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 일하는 엄마, 오히려 가족이 먼저 배려

힘든 업무 속에서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 덕분에 삶의 활력을 느낀다는 계산원 김 연숙 씨.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일하는 엄마는 가족에게 늘 미안할 것 같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엄마의 잔소리가 줄어들면서 자녀와의 관계가 더 좋아졌다는 것. 사회생활을 해보니 공감대가 늘어 남편과의 사이도 더 좋아졌다는 엄마도 많았다. 윤선자 씨(45)는 “일을 하다 보니 남편이 힘든 것도 알게 된다”며 “남편이랑 진상 손님 이야기도 자주 한다”고 말했다.

일과 가사, 이중의 부담 때문에 너무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엄마들은 고개를 젓는다. 가족이 먼저 일하는 엄마를 돕는다는 것. 처음에 남편의 “그만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더 악착같이 집안일도 열심히 했다는 김혜영 씨. 이제는 남편이 아침에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해놓고 출근할 만큼 변했다. 이덕미 씨도 “남편이 집안일을 도우며 주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모 씨(47)는 엄마를 걱정해준 작은아들의 고운 마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2009년 엄마가 마트에서 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은 마트 계산원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집에 돌아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일이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이해해주고 도와줘서 큰 힘이 된다”고 했다.

○ 힘들어도 정년까지!

일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은 때도 있다. 하루 6시간 반을 서서 일하는 건 육체적으로 무척 고되다. 돈을 던지거나 무턱대고 반말로 소리를 지르는 ‘진상’ 고객이라도 만나는 날은 돈이고 자부심이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든다. “고객님” 소리가 입에 붙은 건 일종의 직업병. 김혜영 씨는 “쉬는 날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 다른 손님한테 ‘고객님, 비켜주세요’라고 말해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며 웃었다. 그는 아들에게도 무심코 ‘고객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래도 엄마들은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오래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녀들의 학원비를 보태려고 시작했지만 이젠 본인의 노후 대비를 위해 일한다는 것. 정미경 씨(47)는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나와서 일하는 게 보람 있고 좋은 것 같다”며 “60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지희 씨(49)는 “어떤 사람은 바코드가 안 보일 때까지 일하고 싶다더라”면서 “정년이 연장된 건 좋은 일”이라며 웃었다. 김성임 씨(50)는 “애들은 걱정 말라고 하지만 노후대책은 내 힘으로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선희 씨(49)는 “남편이 ‘내 노후는 이제 네가 책임지는 거다’라고 농담을 건네곤 한다”며 남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보,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 내가 먹여 살릴게∼.”

주애진·김성모·곽도영 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