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홍찬식 칼럼]국민인가, 시민인가

입력 | 2013-05-08 03:00:00

애국가와 순국선열 자리에 ‘임을 위한 행진곡’ 울려퍼지는 노동단체 행사 보듯
‘국가와 국민’ 대신 ‘민주와 시민’이 자리 잡은 민주당 강령은
자신들을 있게 해준 국가를 잊어버린 자기모순




홍찬식 수석 논설위원

민주당이 “60년을 지켜온 민주당의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다짐하며 강령을 대폭 개정했다. 강령은 국가로 치면 헌법에 해당한다. 정당이 추구하는 기본 철학과 정체성이 담겨 있다. 논란의 대상이 됐던 ‘99% 국민을 위한 정당’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전면 재검토’ 같은 문구는 삭제됐고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 국가 체제의 출발점이 된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민주당의 강령 전문(前文)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건국정신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하지만 광복과 건국, 6·25전쟁은 건너뛰고 바로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제1야당으로서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부터 활동해 왔고 10년에 걸쳐 집권당 역할까지 했던 민주당의 강령에 ‘국가’와 ‘국민’은 보이지 않고 ‘민주’와 ‘시민’이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국가 체제를 전제로 하는 ‘한미동맹 발전’ ‘튼튼한 안보’ 등 새로 추가한 강령 문구들이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어색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국가와 국민이 사라지는 현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노동단체들은 행사를 개최할 때 국민의례 대신 노동의례를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례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으로 이뤄지지만 노동의례는 민족민주 열사에 대한 묵념에 이어 운동권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순서로 끝난다. 태극기와 애국가의 자리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리 잡고,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온 선열들은 민주투사로 대체되고 있다.

노동단체들은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를 애국할 수 있는 나라로 변혁시킨 뒤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데 지금은 애국가를 부를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은 세계 15위권으로 도약한 국가경제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잘 누려온 세력이다. 비정규직에 비해 월등한 대우를 받고 있고, 고용 안정성 면에서 어느 집단보다도 탄탄해 ‘기득권 노조’라는 말까지 나온다. 노동단체들이 기꺼이 애국가를 부를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어떤 세상이 와야 하는지 궁금하다.

시민단체들도 국민이라는 말을 꺼리고 있다. 이들에게서 ‘민주 시민’이라는 단어는 나와도 ‘민주 국민’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편향된 이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시민이라는 말을 앞세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부 역사학계의 인식도 민주당 강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와 인권이 진전되어온 관점으로만 역사를 바라본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인식도 여기서 비롯된다. 남한보다 북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6·25전쟁에 대해 ‘남침’을 언급하지 않은 채 ‘6·25전쟁이 일어났다’고만 서술하고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다. 그 이후는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으로 연결해 버린다.

반면에 50, 60대들은 대개 국가와 국민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우리 사회가 국가와 국민을 지지하는 쪽과 민주와 시민을 말하는 이들로 확연히 나뉘어 있는 느낌이다.

국가와 국민, 태극기와 애국가를 얘기하면 “과거 독재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국경이 갈수록 사라지는 세계화 시대에 국가와 국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이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기초적인 요소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치 않는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 민족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독립된 나라를 갖는 일이었다. 1960년대 가난하던 시절 서독에 광부로 파견됐던 한 인사는 “낯선 땅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대한민국을 많이 원망했으나 나중에는 우리나라가 존재했기 때문에 결국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국가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국가와 국민은 다른 가치를 훨씬 넘어선다.

요즘처럼 국가 간 인구 이동이 활발한 시대일수록 국가와 국민의 의미는 더 소중해진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130만 명에 이르고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생긴 다문화가정은 38만 가구에 달한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가 개념을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고, 국민의 범위도 그만큼 넓혀 가야 한다.

민주당과 같은 정당은 국가와 국민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도 사라진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국가 체제를 배제하는 강령은 자기모순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와 국민을 인정하는 공감대는 지켜나가야 한다. 이런 전제 없이 맞서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소모적 대립으로 계속 날을 지새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찬식 수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