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 전쟁으로 시작된 두 나라의 기구한 인연은 국제결혼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작은 싸이’라 불리는 황민우 군에게 퍼부어지는 모질고도 모진 인종차별을 보라. 한국인에 의한 베트남의 비극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부모 세대는 한국군이 참전한 전쟁의 상처를 입었다. 결혼으로 한국에 건너온 딸들은 멸시와 학대를 겪고 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이방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있다. 그들뿐 아니다. 전쟁 사생아로 베트남에 버려진 ‘라이따이한’과 그 2세들의 고통도 있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나라의 몸부림이 전쟁과 국제결혼으로 부딪히면서 슬픈 역사를 만들고 있다.
참전의 이유야 어찌됐든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남의 국민을 희생시킨 것은 그 국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일 것이다. 한국군의 용맹성이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희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신부의 한국 진출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이제 그 수가 7만 명이 넘어 전체 결혼이주여성의 34.3%를 차지한다. 중국 등을 제치고 1위이다.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태어나는 아기 100명당 2명꼴로 엄마가 베트남 사람일 정도다. 이들도 경제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왔다.
2011년 한 베트남 신문은 한국에 있는 베트남 여성 문제를 다룬 기사에서 “결혼에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냐 돈이냐? 세계 대부분의 여성에게 그것은 아마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 그들의 정체성마저 뒤로한 채 한국 남자와 살기로 동의하고 국경을 넘은 베트남 처녀들의 가슴에는 돈이 있다”고 썼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빚을 갚고 동생들을 학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 돈에 운명을 건다는 것.
대부분 열다섯에서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거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있고 가난에 시달리는 신랑을 만난 베트남 신부들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노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을 파탄케 하는 것도 돈이다.
이러한 불행의 마지막은 한국 남편의 아내 살해이거나 베트남 여성의 자살이다. 이 신문은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은 냉정한 계산에 따른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썼다. 한국 남성은 성욕을 채우고 아이를 얻기 위해, 베트남 여성은 베트남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서로 거래를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베트남 대통령은 한국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베트남 신부들이 잘 정착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즈음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자격을 검증해 결혼을 허가키로 했다. 한국의 민간단체와 함께 한국 남성들의 나이와 직업, 월수입, 가족관계 등을 심사해 결혼 적격 여부를 판정키로 했다. 오죽하면 대통령과 정부가 나섰겠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신문기사는 베트남 사람들과 정부가 가진 한국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로망의 나라이다. 젊은이들은 한국문화에 열광하며, 한국 경제를 부러워한다. 20세기는 일본이 베트남 정치 문화 발전의 모델이었다. 베트남 학자들은 21세기엔 한국이 작은 나라도 경제대국 문화대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중국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기비하가 심했던 베트남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은 잊기 어려우나 잊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2000년 영국 로이터통신의 질문에 베트남 외교장관은 “한국군이 베트남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질렀다. 이웃 나라와 인도적이고 평화적으로 지내는 전통에 따라 과거를 덮어두는 것이 베트남의 정책”이라고만 말했다.
3대에 걸쳐 베트남인들에게 깊은 아픔을 주고 있는 한국인에게도 억장이 무너지는 피해자의 역사가 많지 않은가. 한국인은 중국 일본 몽골 등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겪었다. 얼마나 많은 양민이 학살당하고 침략자의 나라로 끌려갔던가.
그 피해자의 고통을 상징하는 현대사의 기록이 일제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러기에 베트남 사람들의 아픔을 씻어줄 충분한 이유와 책임이 한국인에게 있다. 마구잡이 신부 수입과 그들에 대한 학대, 그 아이들을 모멸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심성과 태도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잊는다고 우리의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아픈 과거를 영원히 기억한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