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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퍼기”

입력 | 2013-05-09 03:00:00

■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 은퇴 선언




백발의 노신사는 언제나 검은색 코트를 입고 축구장 한편의 감독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팀이 지고 있을 때면 그의 얼굴은 어김없이 붉어진다. 동시에 그가 껌을 씹는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경기 중에 실수를 한 선수는 라커룸에서 그에게 호된 질책을 당한다. 억센 스코틀랜드 억양과 함께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은 선수들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할 정도다. 선수들은 그에게 ‘헤어드라이어’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열정의 화신’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72)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 열정적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지휘하는 퍼거슨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퍼거슨은 8일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2012∼2013시즌이 끝나면 현장에서 물러나 구단 이사로 활동하게 됐다”고 밝혔다. 1986년 맨유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 햇수로 28년째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지만 퍼거슨은 강산이 세 번 변할 동안 꾸준히 맨유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세계 축구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한 명인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유망주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으로 프리미어리그 13회 우승,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 5회 우승,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등을 이끌었다. 퍼거슨은 39년의 지도자 생활 동안 각종 대회에서 총 49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 맨유가 트레블(프리미어리그, UEFA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달성한 뒤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2005년에는 에인트호번(네덜란드)에서 뛰고 있던 박지성(퀸스파크 레인저스)을 영입해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팀이 된 맨유는 퍼거슨의 열정과 에너지, 선수를 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지도자 생활은 해가 갈수록 악화되는 건강 탓에 멈춰버렸다. 영국 언론은 “퍼거슨은 2004년에 심장박동기 이식 수술을 받았고, 지난해 5월에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응급실에 실려 가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모습을 수차례 보였다”고 전했다. 이번 시즌 맨유의 리그 우승을 이끈 퍼거슨은 “맨유가 가장 강할 때 떠나고 싶었다”며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을 택했다.

퍼거슨 리더십의 핵심은 ‘엄격함’이다. 그는 선수들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길 원한다. 경기 전날 파티를 벌인 선수, 과음으로 훈련에 지각한 선수에게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린다. 팀의 주축 선수라도 예외가 없다. 맨유의 간판 공격수 웨인 루니는 2011년 12월 코칭스태프 몰래 훈련장을 빠져나간 뒤 가족과 함께 외식을 즐겼다가 거액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퍼거슨은 ‘심리전의 고수’다. “팀보다 중요한 선수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는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팀워크를 해친다고 생각되면 쓰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데이비드 베컴은 2003년 아스널과의 FA컵 하프타임 때 퍼거슨과 말다툼을 벌였고, 퍼거슨은 축구화를 걷어 차 베컴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베컴은 그해 6월 레알 마드리드(스페인·레알)로 이적했다. 퍼거슨에게 반기를 들거나 동료를 비난한 선수는 어김없이 버려졌다. 그러나 선수가 진정으로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퍼거슨도 ‘따뜻한 큰형님’으로 변한다.

퍼거슨은 맨유의 사령탑에 머무는 동안 핵심 선수의 이적으로 인해 수차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변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2009년 팀의 에이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레알로 이적했을 때는 루이스 나니 등 호날두의 그늘에 가려 있던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줘 공백을 메웠고, 지난해 주전 미드필더의 부상으로 위기가 왔을 때는 은퇴한 미드필더 폴 스콜스를 복귀시키는 결단력을 보여 줬다.

한편 퍼거슨의 후임으로는 여러 명이 거론되고 있지만 데이비드 모예스 에버턴(잉글랜드) 감독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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