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끌려갔던 포로가 탈북해 공개, 12명은 사망… 한국귀환 4명도 포함박선영 이사장 “신빙성 매우 높아” 13년만에 명단 공개한 탈북 국군포로“한국에 온뒤 수없이 조사 받았지만 다른 국군포로 실태 한번도 안물어봐”
북한 함경남도 검덕광산으로 끌려가 집단 수용생활을 했던 국군포로 69명의 명단이 나왔다.
사단법인 물망초 박선영 이사장(전 국회의원)은 8일 “2000년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 A 씨가 자신과 함께 노역한 국군포로 69명의 명단을 최근 작성했다”며 그 명단을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탈북 국군포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군포로 명단을 만든 건 처음이다.
이 명단엔 A 씨와 함께 6·25전쟁 때 포로로 끌려간 직후부터 검덕광산에서 생활한 국군포로들의 이름과 나이, 출신지, 광산에서 강제노동한 직종, 국군포로들의 당시 건강상태, 수용생활 이후 행적, 사망자의 사망 시기까지 적혀 있다.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는 생사 확인이 최우선 과제인 만큼 이 명단은 정부가 국군포로들의 실상을 확인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A 씨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검덕광산에서만 약 600명의 국군포로가 강제노동을 했다. 인근의 용양광산에서도 400여 명의 국군포로가 노역했다. 두 광산의 국군포로들은 1956년 7, 8월경 농장이나 다른 지역의 광산으로 보내졌다. 검덕광산은 함남 단천에 있으며 납과 아연광산으로 유명하다.
600명 가운데 명단이 확인된 69명만 해도 검덕광산에서 운광공(광석을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 굴진공(굴을 뚫는 작업을 하는 사람) 발파공 측량공 기계수리공 시료채취공 보일러수리공 목공 농장원 설계원 자재조달원 등 광산 운영에 필요한 온갖 일에 동원됐다. 6·25전쟁 이후 북한의 광산과 탄광이 국군포로들의 강제 노역으로 운영, 유지됐음을 보여 준다. 69명 중 운광공이 29명으로 가장 많았다. 상당수 국군포로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단순하고 힘겨운 노동을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69명 가운데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4명뿐이다. 이들 4명 중 2명은 한국에서 2007, 2008년 세상을 떠났다.
A 씨는 2000년 탈북하기 전까지 69명 중 12명이 북한에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그 12명 중 절반에 가까운 5명이 포로로 처음 끌려온 검덕광산 인근의 동암광산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12명 중 6명이 60대 나이로 1990년대에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중 충청 출신의 김모 씨는 1960년대에, 전북 출신의 김모 씨는 1990년대 초 숨졌다. 동암광산으로 보내진 전남 출신의 박모 씨는 1990년대 말 사망했다.
명단상 국군포로들은 현재 생존해 있다면 81∼87세가량이다. 고령으로 인해 자칫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국군포로 상당수가 세상을 떠날 우려가 높은 이유다. 69명의 출신지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로 고루 퍼져 있었다.
명단에 따르면 경상도 출신의 김모 씨는 검덕광산에서 보일러수리공으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그는 결국 1970년대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안타깝게도 처형됐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전북 출신의 고모 씨는 광석을 나르는 운광공으로 강제노동을 했다. A 씨는 고 씨가 폐병으로 고생했다고 기술했다. 공기가 탁한 광산에서 치명적인 폐병을 앓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는 얘기다. 전북 출신의 김모 씨는 몸이 허약해 어느 지방 농장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A 씨는 6·25전쟁 중인 1953년 포로가 돼 30여 년을 광산에서 노역했다. 그는 북한 내무성 건설대(1708부대)로 배치돼 검덕광산으로 끌려갔다.
A 씨는 최근 박 이사장에게 “국군포로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한국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함께 생활한 국군포로 중 얼굴과 이름, 특징을 기억하는 69명의 명단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A 씨는 익명을 요청했고 물망초가 13일 개설하는 국군포로 신고센터에 이 명단을 접수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박 이사장은 전했다.
박 이사장이 A 씨에게 “왜 이제야 명단을 만들었느냐”고 묻자 A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정부기관에서 많은 조사를 받았지만 내 신상 이외에 다른 국군포로의 생사나 실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물어야 답을 하지 않겠느냐.”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