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노을에 울음이 타는 강… 곱게 늙은 내 누님같은 ‘갱갱이’
강경 옥녀봉에서 바라본 금강황산나루(놀뫼나루). 붉은 해가 강 너머 부여군 세도면 벌판으로 질 때면 하늘도 붉고, 땅도 붉고, 금강물도 붉게 물들어 일렁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강경∼군산(37km) 간 정기 운항선이 다녔지만, 금강 하굿둑이 생긴 이후로 뱃길이 끊겼다. 조선시대 황산나루엔 하루 100여 척의 고깃배와 상선이 줄을 섰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침을 튀기며 흥정을 벌였다.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는 말은 이제 옛말로만 남았다. 강경=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슬리고
뜨는
하염없는 개펄
살더라, 살더라
목이 메는 백강 하류
노을 밴 황산 메기는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갱갱이’ 강경은 ‘강가의 햇볕고을’이다. 그래서 ‘江(가람 강)+景(볕 경)’자의 ‘江景(강경)’이다. 금강 하구 동쪽 기슭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강 건너 서쪽 부여로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 그 누구라도 넋이 빠진다. 몽롱하고 황홀하다. ‘놀뫼(論山)’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강경 아래 남쪽은 호남평야 들머리의 전북 익산이다. 너른 들판과 야트막한 산, 그리고 느릿느릿 벙벙하게 흐르는 금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만큼 강경은 기름진 땅에 농사지을 물이 넘쳐나는 부자 동네였다.
옛날 강경에선 밥 굶는 일이 없었다. 강경은 늘 사람과 온갖 물산으로 흥성거렸다. 서해바다 뱃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사꾼들로 시끌벅적했다. 하루 100여 척의 배가 강 위에 줄을 섰고, 2만∼3만 명의 상인이 침을 튀며 흥정을 하기 바빴다. 자연스럽게 원산에 이어 조선 2대 내륙 항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 3대 시장(1-평양, 2-강경, 3-대구)으로 거대 중간상인 집단인 객주까지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객주 이웅선 한옥 고택이 그 좋은 예다.
강경은 이제 논산시(13만여 명)에 속하는 작은 읍이다. 주민도 모두 해봐야 1만1000여 명이나 될까.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는 말은 꿈같은 옛말이 되었다. 영락없는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어느 한순간 일제히 동작을 멈춘 ‘정지된 도시’라고나 할까.
대전지방법원논산지원, 대전지방검찰청논산지청, 논산경찰서가 아직까지 강경 읍내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기특하다. 강경은 그만큼 ‘뿌리 깊은’ 동네다.
강경은 어슬렁어슬렁 걸어도 두세 시간 정도면 너끈히 돌아볼 수 있다. 거리마다 곰삭은 젓갈 냄새가 스멀스멀 우러난다. 젓국 닮은 우중충한 낮은 건물과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춘향전의 이도령도 밟고 지나갔던 무지개 모양의 미내돌다리, 사계 김장생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임리정, 우암 송시열이 세운 팔괘정, 강경시장 중심에 있었던 옛 연수당한약방, 1937년에 지은 붉은 벽돌의 중앙초등학교 강당, 1931년 건축된 강경상고 교장 관사, 1925년 한옥으로 지은 옛 강경노동조합건물,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장 관사, 일제강점기 세무서장 관사, 김용원 가옥, 강경화교학교, 국궁활터 덕유정….
강경 읍내는 옥녀봉(43.9m)이나 채운산(57.4m), 돌산전망대에 오르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딸기와 수박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펼쳐진다. 황산포구의 불 꺼진 등대도 외롭게 서 있다. 군산과 강경의 물길(37km)을 밝혀주던 그 불빛은 더이상 켜지지 않는다. 1960년대까지 오가던 정기 운항선도 금강 하굿둑으로 그 수명을 다했다.
‘옥녀봉 느티나무 만삭의 몸 풀어낸다/저문 강 외길을 걸어 흠뻑 삭은 새우젓/토사가 저리 쌓여도 역사는 흘러간다//갯바위 끌어안고 눈매 붉은 고목 앞에서/뱃길 잃은 설움을 육필로 쓴 갈잎처럼/저 멀리 불 꺼진 등대 달빛 감아 내린다.’ (김광순 ‘옥녀봉 느티나무’)
‘울보시인’ 박용래만큼 고향 강경을 사랑한 사람이 있을까? 그가 노래한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은 어쩌면 그의 어릴 적 소꿉동무인지도 모른다. 그는 고향 강경에서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노래했다. 해거름 녘 날마다 놀뫼나루(황산나루) 황산옥 봉놋방에 앉아 들창 밖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아름답고, 약하고, 애틋하고, 작고, 착한 것만 보면 울었다. 갸륵한 참새 새끼만 봐도 눈물을 흘렸다. 가녀린 풀꽃을 보고도 울었다. 저녁 무렵 동네 골목길에서 시래기 삶는 냄새를 맡아도 훌쩍거렸다. 그는 더도 덜도 없는 강경사람 그대로였다. 내포들판을 닮아 부드러웠고, 농부의 아들이라 소박했다.
‘난/채운산/민둥산/돌담아래/손 짚고/섰는/성황당/허수아비/댕기풀이/허수아비/난.(‘마을’ 전문)’
꽃피는 봄, 금강 하구엔 웅어가 나타난다. 웅어는 맛있다. 뼈째 썰어 초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다. 미나리, 오이, 당근, 양파에 참기름 몇 방울 살짝 떨어뜨린 무침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웅어는 멸치와 사촌쯤 되는 은빛 날렵한 물고기. 핏대 성질이라 잡자마자 ‘제풀에 뛰다 죽는다’. 길이는 20∼30cm 정도. 3월이면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하구 갈대숲은 이들의 안성맞춤 산란지. 한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하류에서도 이맘때 잡힌다.
“여기 사람들은 ‘우어, 위어, 우여’라고 합니다. 11월 늦가을에도 가끔 나타나지만 주로 3∼5월까지 잡히지요. 금강 하굿둑이 생긴 뒤론 군산 서천 앞바다에서 그물로 잡은 것을 사옵니다. 전어보다 기름이 많아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히지요. 날로 썰어서 묵은지에 싸 먹어도 그만입니다. 보름이나 그믐사리 때 많이 잡히고 조금 땐 덜 잡힙니다.”
3대째 웅어전문집 황산옥(041-745-4836)을 하고 있는 신창호 사장(54·사진)의 말이다. 황산옥은 1915년 신 사장의 조부가 황산나루터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엔 웅어보다 황복이 더 많이 잡혔고 인기가 좋아 황복매운탕을 주로 했다. 손님 10여 명을 맞을 수 있는 자그마한 주막집 규모였던 것이 현재 300여 석이나 되는 큰 식당으로 바뀌었다. 웅어가 잡히지 않는 계절엔 봄에 잡아 냉동해 둔 것을 쓴다. 부여 신흥옥(041-833-3015), 익산 어부식당(063-862-6827)도 웅어로 이름난 곳이다.
황산옥 신 사장은 ‘한때 자신이 군산에 나타나면 웅엇값이 들먹거릴 정도였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그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며 뿌듯해했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놈(28)이 서울에서 직장 다니다가 대를 잇겠다고 내려와 마음 든든합니다. 요즘 관광버스 단체 손님도 많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손님은 우리 식구라고 생각합니다. 1974년 사라진 황산나루터가 눈에 선합니다. 나룻배 기다리는 손님들은 으레 우리 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지요.”
정방형 한옥교회당 강경 옛 성결교회.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의 보물창고
강경은 활짝 열린 고을이다. 개화기에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 바로 강경이다. 서해바다 뱃길을 통해 각종 해산물은 물론이고 서양 문물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1896년 기독교침례교회가 한국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내디뎠고, 1901년엔 감리교회가 그 뒤를 따랐다. 1918년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성결교회는 옥녀봉 아래에 정방형의 한옥교회당을 지었다. 1923년 영국 존 토머스 선교사의 헌금으로 지어진 한옥교회당은 현재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42호)으로서 정면-측면 비율이 각각 4칸의 1 대 1 비율이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세워진 기둥에 휘장을 드리워 남녀 신도의 좌석을 분리했다. 1915년 지어진 전북 김제 금산교회 한옥예배당이나 1929년 세워진 전북 익산 두동교회 한옥예배당과는 조금 다른 형식이다. 이 두 곳은 ‘ㄱ’자형 꺾여지는 곳의 설교대를 중심으로 남녀 좌석이 서로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당시 강경성결교회 백신영 전도사는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는 미신이고 우상이니 하지 말라’고 그 부당성을 가르쳤다. 결국 이 가르침은 1924년 강경소학교(현 강경중앙초교) 학생 62명의 참배 거부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조선팔도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논산 병촌성결교회는 1950년 9월 6·25전쟁 당시 66명의 신자가 공산군에 무참하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강경 부근엔 천주교 성지 나바위성당(사적 제318호)도 있다. 행정구역으론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강경에서 손에 닿을 만큼 가깝다.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푸아넬 신부의 작품으로 1906년에 지었다. 한옥과 양옥을 섞은 절충식 성당. 남녀 좌석을 칸막이로 막았고 출입구도 각각 달랐다.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정겹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품을 받고 강경포구에 닿은 것을 기념했다. 성당은 당시 나루터가 있었던 자리.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강경 동쪽 은진 반야산 으늑한 곳엔 높이 18m의 관촉사 돌미륵이 강경을 바라보고 있다. 터질 듯 풍만한 앞가슴, 복스러운 두 귀, 두꺼운 입술, 두툼한 맨발…. 언젠가 다가올 후천개벽의 시대를 꿈꾸고 있다.
한옥 양옥 절충식의 나바위성당.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품을 받고 돌아올 때 첫발을 디딘 곳이다.
■ Travel Info
♣ 강경은 젓갈로만 200여 년 곰삭은 ‘젓갈의 도시’. 읍내에만 젓갈가게가 100여 개에 이른다. 주요 젓갈은 역시 새우젓. 여기에 황석어젓, 꼴뚜기젓, 조개젓, 명란젓, 어리굴젓, 창난젓, 개불젓, 까나리액젓, 아가미젓, 멸치액젓, 오징어젓, 낙지젓 등 거의 모든 젓갈을 취급한다. 다른 곳에서 젓갈 재료를 사다가 ‘강경 나름의 독특한 비결로’ 숙성시켜 내놓는다. 강경 발효 젓갈은 전국 유통량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형제상회(041-745-4444), 신진상회(041-745-4516), 재성상회(041-745-4902), 함열상회(041-745-4134), 강경상회(041-745-1788), 충남상회(041-745-0584), 왕젓갈(041-745-0018) 등에 발길이 붐빈다. 택배도 가능하다.
형제상회 박청수 대표(73)는 “강경에선 국산 젓갈재료를 쓰지 않으면 발 못 붙인다. 위생도 철저하다. 그런 신뢰가 쌓여 그 명성이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김장철에 수요가 가장 많긴 하지만 특별히 계절을 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교통
▽기차=용산∼강경역 ▽고속버스=서울남부터미널∼강경 ▽승용차=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연무나들목∼강경
▼먹을거리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오골계 행복한 밥상(예약 필수 041-735-0707, 736-0707) ▽태평식당(복찜 아귀탕 041-745-0098) ▽궁중(보리밥정식 041-745-4947) ▽충남불고기(한정식 041-745-6603) ▽미당복집(041-745-5487) ▽남촌칼국수(041-745-3216)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