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조례’에 멍드는 학교현장
○ 실적 쌓기·말뚝박기용 조례에 피로감 누적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 학생은 불편함을 호소했다. 한 학생은 “괜히 공부하면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했다. 집회 내내 대기한 교사들도 마찬가지 심정. 그런데도 학교는 제지하지 못했다. 지난해 1월 공포된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학내 집회 권리를 보장한다.
결국 학교 측은 학부모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자녀를 데리고 가라고. 집회가 계속되자 마지막엔 경찰까지 출동했다. 집회를 지켜본 박모 교사는 “학교가 정치운동의 놀이터가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경기 C초등학교는 최근 교육청으로부터 조례대로 임원을 정확히 구성하지 않았으니 학부모회를 재조직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가뜩이나 바쁜 학기 초에 업무가 급증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구성된 학부모회는 기존 학교운영위원회와 갈등을 빚었다. 이모 교사는 “교사가 어느 조직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고 전했다.
한번 생긴 조례는 교육감이 바뀌거나 교육현장 상황이 달라져도 바꾸기 쉽지 않다. 시도 의회를 통과해야 수정 또는 폐기가 가능하다.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개입돼 있다. 그런데도 ‘아니면 말고 식’ 교육 조례가 남발된다. 충분한 논의나 법적 논리에 대한 검토 없이 만들어진다. 일종의 ‘실적 쌓기용’인 셈이다.
상위법과 충돌하는 ‘말뚝박기용’ 이념 조례도 문제. 지방교육청 관계자는 “의원들이 나눠 먹기식으로 다른 의원 조례에 거수기 역할을 해주다 보니 조례가 양산된다”고 지적했다.
○ 교사 90% “조례로 스트레스 커졌다”
조례가 제정됐다고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진 않는다. 이를 연착륙시키려는 노력도 결국 학교의 몫이다. 예를 들어 학생인권조례가 생기면서 두발 복장 소지품을 어떻게 규제할지 일선 학교들이 다시 판단해 학생에게 전달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학교 현장의 스트레스는 동아일보-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설문 결과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 서초구 D고교 임모 교사의 별명은 ‘임 조례’. 학교에 떨어지는 교육 조례 관련 업무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친다 해서 선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처음엔 하나둘씩 하던 일이 언제부턴가 그냥 그의 전담업무가 돼버렸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업무량이 늘어난 점 외에 워낙 민감한 사안이 많아서다. 그는 “잠깐 휴직계라도 내서 조례로부터 탈출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임 조례’ 같은 교사는 다른 학교에서도 흔하다. 전국 초중고교 교사 372명 가운데 ‘교육 조례가 학교에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가중시킨다’고 답한 응답자는 91.4%에 이르렀다. ‘교육 조례로 스트레스가 가중됐다’는 교사는 90.1%. 교육 조례가 교사 사이, 교사와 학생·학부모 사이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답한 응답자도 각각 79.8%, 87.9%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도 남발되는 교육 조례의 심각성을 최근 인지했다. 일단 한국교육개발원(KEDI)을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 제정된 교육 조례 현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후 이들 조례가 끼친 영향을 분석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과)는 “교육 조례가 본연의 목적인 학교 현장 지원이라는 취지로 돌아가야 ‘조례 공화국’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진우·김도형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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