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토요스케치]“우리가 마지막 라스일지도… 진짜 라이벌전은 지금부터”

입력 | 2013-05-11 03:00:00

20년 만에 2시 라디오서 맞붙는 ‘전설의 DJ’ 김광한-김기덕




다시 만난 DJ 김광한(왼쪽)과 김기덕은 “라디오 스타는 언어 구사력, 프로그램 기획력, 음향 엔지니어로서의 소양에 인간적인 개성과 매력, 선곡의 묘까지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김광한입니다. 여러분은 뭘 보면 가슴이 제일 뛰시나요? 오늘은 이 곡으로 시작해보죠. 올리비아 뉴턴 존의 ‘재너두’!”

6일 오후 2시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 3층 FM 스튜디오. 경쾌한 뉴턴 존의 목소리가 흐르는 동안 검은 헤드폰을 낀 DJ 김광한(67)이 음향 믹서가 빼곡한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 그의 진행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턴 존 같다. 입으로는 코멘트를 하면서 동시에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초록색 음량 조절기를 피아노 페달 밟듯 세심하게 올렸다 내린다. 그의 손을 따라 말과 말 사이에서 음악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지난달 29일, 김광한은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월∼토요일 오후 2∼4시)로 CBS 표준 FM(98.1MHz)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서라벌예술대 재학 시절부터 해박한 음악 상식으로 유명했던 그는 1966년 1월 한국 최초로 FM 전파를 내보낸 서울FM에서 최연소 팝송 전문 라디오 DJ가 됐다. 이듬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음악다방 DJ를 하던 그는 1980년 TBC FM ‘탑튠쇼’로 다시 DJ 자리에 앉았다. 1981년에는 KBS 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존 덴버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트리니 로페스의 ‘레몬 트리’, 포코의 ‘시 오브 하트 브레이크’…. 김광한이 추억의 팝 명곡을 연달아 틀자 컴퓨터 모니터에 전국에 있는 청취자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예전엔 엽서에 신청곡 보내곤 했었는데 다시 방송에서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오학년 중반입니다. 올드팝을 들으면서 꿈 많던 여고시절이 스크린처럼 지나갑니다. 수전 잭스의 에버그린 꼭 들려주세요^^’

김광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질 때쯤 스튜디오 바깥 FM 주조정실로 김기덕(65)이 걸어 들어왔다. 1부가 끝나고 시그널이 나갈 때 김기덕이 15m²쯤 되는 김광한의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아유, 오랜만이야.” “건강하시죠?” 서로 인사를 나눈다. 김광한은 검은색 반팔 셔츠를, 김기덕은 새하얀 긴팔 셔츠를 입고 왔다. 이날 방송에서 둘은 가정의 달을 맞아 ‘패밀리’를 주제로 선곡 배틀(대결)을 벌이기로 돼 있었다.

1.5m 거리를 두고 스튜디오 양편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기자는 두 의자 사이, 스튜디오 맨바닥에 염탐꾼처럼 쪼그려 앉았다.

‘온 에어’에 불이 들어왔다. “코드!”(손근필 PD) “(초대손님인 김기덕을 소개하며) 전설의 귀환! 한국 FM 시대의 막을 연 주인공! DJ, 성우, 연극배우…. 너무 많이 하신 분 같아요.”(김광한)

“안…녕하쎄요! 안…녕하쎄요! 두우 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헤! 헤! 헤!”(김기덕)

“점잖은 분이 또 (경망스럽게) 웃고….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김광한)

“하긴 제가 나오면 좀… (김광한이) 찌그러들지. 트라우마가 있지. 헤헤.”(김기덕)

둘의 점잖은 설전에 두 PD와 작가, 기자까지 4명이 숨죽여 웃느라 혼난다. “큭큭… 흡.”

‘원정팀’ 김기덕이 선곡 대결의 선공을 잡는다. “차 한잔하시죠, 싸모님. 좋은 날씹니다. 슈가 냉수 한 잔 먹었으면 좋겠습니다”로 음악다방의 능글맞은 DJ를 연기한 그는 잭슨 파이브의 ‘아일 비 데어’를 튼다.

‘온 에어’ 등이 꺼지자 김광한이 한마디한다. “되게 열심히 하네. 대충해. 겉으론 아닌 것처럼 하고서 상당히 준비를 했네.” 빙긋, 김기덕이 웃는다.

둘의 승패를 결정하는 건 청취자들의 문자와 게시판 참여. 여미영 PD가 막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읽는다. “이분은 ‘김기덕’으로 삼행시를 지어주셨네요. ‘김’치처럼 시원한 목소리, ‘기’운과 힘을 느껴요. ‘덕’목과 지를 겸비한… 김광한 짱!” 김기덕이 한 대 얻어맞는다. 그러나 이내 답지한 뒷자리 ‘9211’님의 ‘역시 기덕 오빱니다’라는 메시지에 김기덕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김광한은 조지 존스와 태미 위넷의 ‘투 스토리 하우스’와 멜바 몽고메리의 ‘노 차지’를 소개했다. 김기덕이 말한다.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오네요! 컨트리라는 게 소박하고 시골스럽죠. 김광한 선생님이랑 어울려요. 허허.”

김기덕이 다시 음악다방 DJ의 느끼한 멘트를 흉내 내며 마지막 곡으로 오스먼드 브러더스의 ‘원 배드 애플’을 소개했다. 그는 오스먼드 브러더스의 LP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추억에 잠겼다.

헤드폰을 내려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스튜디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대기실에 나란히 앉혔다. 둘은 10년 만에 동시간대 라디오에서 맞대결하게 됐다. 김광한이 이번에 오후 2∼4시대 라디오 진행자로 복귀하면서 김기덕이 진행하는 SBS 러브 FM(103.5MHz) ‘두 시의 뮤직쇼 김기덕입니다’(토, 일 오후 2∼4시)와 토요일에 맞붙게 된 것이다. 오후 2시대 대결은 20년 만이다.

김광한은 다운타운 음악다방 DJ 출신으로 감성과 지식을 겸비하고 음악과 노랫말을 잘 소개해온 전문 DJ다. 동국대를 졸업한 김기덕은 MBC 공채 아나운서 출신으로 PD와 DJ를 겸직하며 뛰어난 입담과 기획력으로 청취자들을 끌어당겼고 올해 3월엔 방송 40년을 맞았다. 둘은 1980년대에 KBS ‘팝스 다이얼’(김광한), MBC ‘두 시의 데이트’(김기덕)로 오후 2시에 정면 대결을 벌였다. 열렬한 ‘김기덕파’와 ‘김광한파’도 광고 시간대에는 상대방 방송으로 채널을 돌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1980년대 라디오 시대를 양분했던 김광한(왼쪽)과 김기덕. 동아일보DB

―오늘 대결은 어땠나요.

김기덕=저는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에요. 제가 당연히 져야죠.

김광한=말은 저렇게 해도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아요. 김기덕과 김광한의 선곡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네요. 소개 멘트나 무드도 역시 김기덕다웠어요. 저는 좀 스피드 있고 파워풀한 반면에 김기덕 씨는 사람들 감성에 맞게 툭툭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재치가 있죠.

―전성기 때 상대방 방송도 많이 들어봤죠.

덕=둘 다 생방송을 했기 때문에 서로의 방송을 들어본 적은 의외로 거의 없어요. DJ를 오래 했기 때문에 말이 (음악에) 묻어 들어가는 것은 제가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에요.

한=김기덕 씨는 청취자랑 아옹다옹 노는 걸 얄미울 정도로 잘했죠. 돌아보면 저는 괜히 라디오란 매체의 책임감을 촌스럽게 고려하다 보니 청취자를 가르치려 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엔 자제하려고 해요.

―두 분은 1980년대에 라디오 시대를 이끈 굉장한 라이벌이었잖아요.

한=청취율 조사에서는 김기덕 씨가 늘 앞섰어요. 전 레이프 개릿 내한공연 관련 정보를 제 프로에 독점 제공하면서 한 달 만에 분위기를 반전시켰죠. 여고생들이 제 ‘팝스 다이얼’을 좋아했어요. 전 후에 TV에도 나갔지만 라디오에서는 김기덕 씨가 늘 앞섰기 때문에…전 뭐 슬슬 뒤따라가면서 재밌게 논 거죠.

덕=저는 PD 겸 DJ로 동분서주하느라 라이벌을 의식할 새도 없었어요. 팝송 DJ의 역사에 저희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이종환 최동욱 피세영 같은 1세대가 있었죠. 1971년 MBC 라디오가 개국하고 FM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전문 DJ들이 양산됐죠. 1972년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한 저도 ‘두 시의 데이트’를 진행하다 인기를 얻으면서 PD로 발령이 났죠. DJ로서 어떻게 했다기보다는 PD로서 내 프로를 어떻게 만들어나갈까를 고민했죠.

―이제 토요일 오후 2시에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서 경쟁하게 됐잖아요.

덕=이제는 서울에만 라디오 방송이 20개가 넘는데, 경쟁 구도는 아니죠.

한=경쟁이 된다고 그래. 그래야 기사가 되지. 저 사람이 저러면서 경쟁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라디오 방송은 전과는 다르죠.

한=음악은 우리 삶이고 상상력의 원천인데, 재밌게 떠들기나 하고 소리만 지른다고 할 때 미디어의 사회적 기능은 어디로 갈까요.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은 라디오였죠. 최동욱 씨가 진행하던 동아방송 ‘탑튠쇼’나 ‘세 시의 다이얼’은 한국 방송 최초의 음악 프로이자 히트작이었죠. 대단한 방송이었어요.

덕=팝송 프로가 지금은 거의 없어요. 예전엔 90% 이상이 팝이었죠. 팝송을 많이 듣고 자란 세대가 그때 기른 국제적 감각을 통해 가요의 질을 높였어요. 케이팝의 경쟁력도 거기서 나왔죠.

한=빌보드 차트에 우리 음악이 올라가는 지금이야말로 음악 프로와 DJ를 다시 전문화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해외 팝을 주로 다룬 DJ로서 가요의 시장 독식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한=케이팝의 선전은 물론 좋은 일이죠. 하지만 이제 기획자나 작곡가들이 1960∼90년대 팝의 흐름을 연구해야 합니다. 싸이 현상만 얘기할 게 아니라 연구기관을 만들어야 해요.

―요즘 조용필 열풍도 대단해요.

한=전 사실 좀 아쉬워요. 외국 작곡가들에게 의뢰해 트렌드에 맞는 것만 하려는 것 같아서. 자기 존재감만 알리려 하지 말고 창의적인 실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전국의 라디오 방송을 돌며 음악적 바이러스를 젊은이들에게 퍼뜨렸으면 해요. 싸이도 그래요. 한국 문화의 아이콘이라는 큰 짐을 졌으니 실험을 했으면 해요. 실험이 없으면 죽은 음악이죠.

덕=조용필로 인해 40, 50대 음악 팬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청신호예요.

―DJ는 언제까지 하실 건가요.

한=죽는 그날까지요.

덕=은퇴란 스포츠에서 쓰는 말이에요. 방송인은 은퇴가 없어요.

―너무 옛 추억의 팝만 우려먹으려는 건 아닌가요.

덕=옛날 ‘두 시의 데이트’ 때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지금은 (제 방송이) 훨씬 더 품위 있고 메시지가 있어요. 인터넷 시대인데 새롭지 않을 수 없어요.

한=추억을 얘기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DJ는 레코드가 아니라 라이브예요. 항상 새롭죠. 아하의 ‘테이크 온 미’는 같은 곡이지만 30년 뒤에 들어봐도 새로운 기분이 들어요.

―두 분은 자주 만나는 편인가요.

덕=(교류가) 거의 없어요. 많은 사람이 모인 술자리에서 마주친 적은 있지만 단둘이 겸상한 적은 없네요.

한=그저 이심전심이죠. 서로 몇천 회 방송 특집을 할 때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게스트로 출연한 적은 있어요. 내가 더 많이 해줬는데. (김기덕이) 아직 많이 갚아야 돼. 허허.

―이제는 좀 만나세요.

한=술보다는 집에 초대해서 밥 먹자는 게 제일 좋던데.

덕=그럽시다. 허허.

―다음 생에 태어나도 DJ를 하실 건가요.

한=노, 노! 난 드럼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요즘 홍대 앞에서 드럼을 배워요. 록 밴드를 만들어서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폭풍같이 두드리는 리듬이 좋았거든요.

덕=전 요즘 오디오북 사업을 하고 있어요. 책을 안 읽는 사람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서 4∼5년 동안 저를 포함해 몇 사람이 300∼400권의 책을 낭독해 녹음해뒀어요. 평생의 사업이죠. 다음 생은 모르겠어요. 요즘은 불교에 심취해 있어요. 지금까지 늘 불안과 경쟁 속에서 마음의 평화 없이 살았거든요.

―서로의 앞길을 축복해 줄 만한 곡을 서로에게 골라주시면 어떨까요.

한=음…. 존 마일스의 ‘뮤직’을 권할게요. ‘뮤직 이스 마이 에브리싱’이라는 가사가 담긴.

덕=비틀스의 ‘오블라디 오블라다’요. ‘라이프 고스 온(인생은 계속된다)’이란 가사가 반복되죠. 인생이란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죠. 즐겁게.

한=인생은 돌아가는 거지.

덕=인생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

둘은 마지막으로 “진짜 라이벌전은 지금부터”라고 입을 모았다.

“진짜 라이벌 구도는 지금부터 아닐까요. 언젠가부터 가수나 개그맨, 연예인이 라디오 진행자 자리를 꿰차면서 전문 DJ가 없어졌죠. 어떻게 보면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우리잖아요. 외로우니까 혼자 하면 안 돼요. 라디오 스타가 사라졌잖아요. 음악보다 토크가 주를 이룬 지금 라디오에서… 우린 마지막 라디오 스타일지도 몰라요.”(김광한 김기덕)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