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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것들]‘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이 말만 믿고 집 지었다가 아차차

입력 | 2013-05-11 03:00:00

서울대 미대 출신 목수 이정섭 씨




2일 강원 홍천군 내촌면의 내촌목공소 전시장에서 이정섭이 자신이 만든 가구들 사이에 앉았다. 만든 이를 닮은 가구들은 모두 군더더기 없이 담백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2일 오후 강원 홍천군 내촌면의 ‘문화식당’. 문을 열지 않는 날도 있어 미리 주문부터 하고 찾아가야 한다는 작은 시골 밥집 앞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악수를 하려 내미는 거친 손끝에는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영락없이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바지 뒷주머니에는 빨간 목장갑이 꽂혀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그가 무릎을 꿇고 상 앞에 앉았다. 마른 몸매에 ‘까치집’은 없지만 더부룩해 보이는 머리. 문득 전날 전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말을 잘 안 해요. 낯선 사람하고는 눈도 잘 안 마주치려고 하고. 술을 몇 잔 하면 좀 낫기는 하지만.”

몇 마디 묻자 간단하게 “예”라고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어떻게든 말을 시켜 보려는 욕심에 소주를 시켰다.



“자신 없어 대학에 갔다”

1995년, 24세 청년이던 그는 ‘전매특허’란 화두를 붙잡고 고민 중이었다. 꼭 미대를 나와야 작가가 될 수 있는 현실에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목공일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고향(경남 창원시 마산)에서 동네 집을 3채나 지은 목수였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대와 집, 목수란 단어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는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미대를 나와 할 수 있는 직업은, 되기 힘든 교수 아니면 작가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삼성, 대우, 현대에서는 미대 출신을 잘 안 받아줬잖아요?”

서울대 미대 출신인 그에게 당시 실제 상황이 어떠했을지 몰라도,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남들이 보기엔 엉뚱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는 게오르규의 ‘25시’를 읽고서 학교를 중퇴해 버렸다. 그것도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교육자인 집안에서였다. 책을 읽고 나서 기존의 사회 가치에 항거하고 싶어진 나머지 기존 가치의 상징인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금은 고등학교를 그만둔 것이 “철없는 짓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조금 다를 수도 있을 듯싶다. 아직도 “대학에 안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러고는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봤다. 그건 자신에게 진 것이었다”고 말하는 그다.

1997년,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세금, 밥값, 술값…. 서울에선 부담되고 신경 쓰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시골로 가야겠다는, 목수가 되면 밥값은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2년 뒤, 진짜 목수가 될 기회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놀러갔던 충북 괴산의 친구 집에서 빈둥거릴 때 한옥 짓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곳이 TV에 나왔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강원 태백의 한옥학교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은 실망스러웠다. 한 달 반 만에 독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곤 곧장 괴산의 친구 아버지에게 대담한 제안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집을 새로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지어 보겠습니다. 연장만 사 주이소.”

친구 아버지가 마련해 준 엔진톱과 전기대패로 미대 나와 놀고 있던 한량 친구들과 집 한 채를 뚝딱 지었다. 한국 전통 양식의 보기 좋은 집이었다. 그때 마련한 연장으로 집 다섯 채를 더 지었다. 하지만 집을 한 채씩 지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속이 공허해졌다. ‘디자인’을 할 필요도 없는 뻔한 집들은 그의 흥미와 열정을 앗아갈 뿐이었다.

2002년, 아무런 연고도 없던 홍천의 내촌이란 동네로 찾아들었다. 집을 짓겠다는 생각은 접어 둔 상태였다. 그 대신 집의 재료인 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정섭이 가수 장기하와 음악회를 열기도 했던 ‘내촌상회’. 6·25전쟁 때의 폭격에서도 살아남은 집이다.

집 물건 하나하나가 ‘Made by 이정섭’

이정섭은 처음엔 집을 지었다 가구로 옮겨 갔다. 그리고 2009년부터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가구 만들기와 건축을 함께하고 있다. 우리나라엔 드물지만 해외에는 건축과 가구 디자인을 함께하는 사람이 많다. 건축과 가구는 조형미와 균형미를 추구하고 하중을 다뤄야 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정섭이 지은 집은 그 하나하나가 작품이다. 내촌목공소의 김민식 고문은 그가 지은 집에 대해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세공의 집’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문고리와 계단, 조명, 화장실 잠금장치, 심지어 벽돌과 전기콘센트 덮개까지 모두 ‘Made by 이정섭’이다. 벽돌은 공장을 빌려 찍어 낸다. 그냥 찍는 게 아니라 흑연이나 염료의 양을 조금씩 조절해 넣어 벽돌 하나하나가 같은 톤이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만든다.

이런 ‘비경제적 행위’는 그냥 평범한 물건은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정섭의 고집 때문이다. 또한 그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맞춤형 재료’를 써야 한다는 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정섭은 지난해 지리산 청학동의 살림집과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미술관을 지었다. 미술관은 규모가 커서 10개월이나 현장을 지켜야 했다. 이 미술관은 곧 개관을 앞두고 있다.

여름이면 서울대 미대 동문들이 이정섭과 합세해 집을 짓는다. 그들이 직접 콘크리트를 붓고 철물을 두드린다. 김 고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학력이 높은 건축 노동자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가 갈 곳에 나무가 가야

두들긴 쇠로 다리를 만든 테이블.

지금 이정섭은 유명인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오너들이 그의 가구를 사 간다. 식사 전 둘러본, 농협 양곡창고를 개조한 그의 전시장에는 모 재벌그룹 사모님이 샀다는 원목 벤치를 비롯한 고가의 가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답게 그는 밥을 달게 잘 먹었다. 총각무를 우적우적 씹으며 식당 주인 할머니에게 연신 꽁치나 나물 같은 반찬을 더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대화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어쩌다 목수가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생이 급격하게 바뀐 적은 없고 모든 것이 다양하게 작용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계속 질문을 던지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필요한 거지예?”라며 역공해 오기도 했다.

그가 달라진 것은 나무와 디자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온 직후였다. 정확히는 ‘당신의 작품이 조지 나카시마(미국의 일본계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자연이 갖는 라인, 돌이나 나무의 모양은 물론 아름답지요. 자연에 대한 나카시마의 경외감은 남달랐던 것 같고요. 저도 자연을 차용하는 능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흥미가 없어요.”

이후 그는 달변가로 변했다. 투박한 듯하지만 철학적이고 날카로운 말들이 이어졌다. 결코 술 때문은 아니었다.

“젠(선·禪의 일본어 발음) 스타일은 어떠신가요?”

“너무 모던한 것 아닌가요? 억지로 만들어진 듯한 느낌도 들고요. 우리나라 사방탁자 정도의 모던함은 좋은데.”

“재료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 하던데요.”

“물성(物性)은 펀더멘털한(근원적인) 겁니다. 쇠는 쇠 같아야 하고 나무는 나무 같아야 하고요. 나무의 물성이 가야 하는 곳에 나무가 가야 하고….”



오래됐다고 무조건 떠받들어야 하나

밥을 먹고 나니 해가 났다. 이정섭의 작업장은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내촌목공소’란 나무 간판을 지나니 집이 15채나 들어선 ‘타운’이 나타났다. 이정섭의 살림집과 작업장, 전시실, 그리고 지인들이 주변 땅을 사들여 세운 집들이다. 15채의 집들은 이정섭이 직접 지었다.

그의 집은 흙벽에 양철지붕을 이고 있는 예쁜 전통가옥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 집은 ‘전통의 계승’이란 것에 대해 그가 생각을 고쳐먹게 만든 계기가 됐다.

“홍천에 들어온 후, 이 집을 괴산 친구 아버님 댁처럼 전통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짓고 나니 제가 그때까지 ‘영민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란 말 말입니다.”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는 집은 겨울이면 엄청나게 추웠다. 장작을 아주 많이 때면 그나마 훈훈하게 지낼 수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열량’ 투입의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후회가 남았다.

“친구 아버님 댁은 사실 농사용 면세유를 때는 집이었어요. 연료비 걱정이 없었던 거죠. 그런 분이나 연료비로 월 100만 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전통의 무조건적 계승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500년 전에 형편없었던 목수가 후세에 단지 그 세월 때문에 떠받들어지는 것은 잘못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실망을 안겨 주긴 했지만, 객의 눈에 비친 그의 집은 남자 혼자 사는 곳답지 않게 정갈하고 예뻤다. 목봉을 이용한 빨래걸이며 손수 만든 싱크대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창가 선반에 놓여 있는 제초제 병조차 인테리어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식물전멸약. 이름이 솔직해서 좋지 않은가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 그가 슬며시 웃고 있었다.



시나브로 조각해 낸 인생

몇 년 전 대영박물관을 방문했던 때였다. 당시 그는 너무 넓어 오랫동안 걸어 다녀야 한다는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얼결에 돌아보고 난 후에는 ‘잘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의 디자인이 지금보다 낫더군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내는 유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봤어요.”

그가 보기에 테이블이란 나무 판때기에 다리 4개를 붙인 ‘고전적 디자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이미 나올 만한 디자인은 옛날에 다 나왔더군요. 심지어 벤딩(나무를 휘어 쓰는 것)도 온갖 것이 다 있었고요.”

대영박물관은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안겨 줬다.

“그리스 조각상을 보는데 수도권 미대 재학생에게 충분한 시간과 돈만 준다면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에 비해 반가사유상 같은 건 따라올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이정섭은 소재 그 자체에 더 천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구를 만들 때 소재를 고르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쓴다. 소재의 선택이 이후의 모든 작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구는 물론 건축에서도 철저하게 소재 그 자체를 드러내 그것으로 승부하는 사람이다.

그가 지은 살림집 한 채에 들어가 봤다. 창틀과 문틀은 모두 나무 그대로의 색과 질감을 드러낸 채였다. 심지어 시멘트 바닥에도 투명 에폭시를 칠해 원재료의 질감과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도료를 섞은 흙으로 미장한 벽은 거칠면서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소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이정섭의 간결한 디자인은 동굴을 모티브로 했다는 집 안에서 묘하게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나는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돌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해방시킬 뿐이다”라고 말했다. 1000년도 더 전에 이 땅에 살았던, 반가사유상을 만든 예술가들도 재료 안에 깃들어 있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를 자연스레 끄집어 내지 않았을까.

이정섭 역시 그럴 것이다. 그 역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무언가를 시나브로 조각해 낸 것이리라.

홍천=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