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시학: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안대회 지음/716쪽·3만8000원/문학동네
문학동네 제공
다산 정약용과 두 아들은 1834년 경기 양평 두물머리 집에 찾아온 손님들과 작별하면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유수금일 명월전신’ 여덟 글자를 운자로 하여 시를 써서 주고받았다. 다산이 유배 시절 전남 강진에서 어울렸던 초의, 철선, 혜즙 스님,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인 서예가 산천 김명희 등과 함께였다. 이들이 딴 운자는 중국의 독보적 시학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이하 시품)’ 가운데 ‘세련(洗鍊)’에 나오는 구절로, 고결한 인품을 지닌 친구를 그리워할 때 자주 인용됐다.
겸재 정선은 74세 때 시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24개의 장면을 상상해 그린 ‘사공도시품첩’을 남겼다. 청나라 때의 화가 반시직(潘是稷), 장부(蔣溥), 제내방(諸乃方)도 시품을 묘사한 화첩을 남겼다. 추사는 시품 전체를 글씨로 써놓았고, 시인과 화가가 늘 옆에 두고 봐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시품에 담긴 풍격 중 ‘섬농(纖농·섬세함과 농후함)’은 작은 풍경이나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되 시인의 여리고 부드러운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찰랑찰랑 시냇물 흐르고/살금살금 멀리서 봄이 찾아왔네./그윽하고 깊은 골짜기를 걷다보면/언뜻언뜻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네.//복사꽃은 나무마다 활짝 피었고/물가에는 산들바람 불고 햇볕 따사롭네./버드나무 그늘 밑으로 오솔길은 굽어들고/꾀꼬리는 여기저기 재잘대네….”
이 ‘섬농’을 읽고서 네 화가가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린 게 흥미롭다. 정선은 버드나무 우거진 봄 풍경 속에 우아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반시직은 복사꽃 가지 끝에 앉은 꾀꼬리를 부각했다. 장부는 복사꽃 만발한 산언덕과 흐르는 물을 그리되 여인을 아주 작게 넣었고, 제내방은 산 중턱에서 두 여인이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는 두 남성을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선비의 자유로운 멋을 표현한 ‘충담(沖淡)’, 영웅의 장대한 품격을 표현한 ‘웅혼(雄渾)’, 뜻을 다 드러내지 않은 채 주제를 암시하는 ‘함축(含蓄)’ 등 동양미를 구성하는 풍격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 두꺼운 책을 덮을 때쯤이면 어렴풋했던 동양미가 슬그머니 눈앞에 다가와 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