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필립 로스 지음·김한영 옮김/540쪽·1만4800원·문학동네
‘밥 펠러가 거짓말처럼 두 게임이나 패하고, 재키 로빈슨만큼 존경하진 않지만 아메리칸리그를 개척한 흑인 선수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던 래리 도비가 22타수 7안타를 친 월드시리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본문의 일부처럼 소설은 ‘기호학’에 가까운 대목이 적지 않다. 이른바 문화와 역사의 차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지는 말자. 진득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인물들의 개성이 살아나고, 그들의 치열한 인생이 지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렇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색과 열정이 가득한 책은 누구에게나 울림을 준다. 명작이란 그런 것이다.
500쪽을 훌쩍 넘는 책의 초반은 미로와 같고 장광설도 길다. 1997년 뉴잉글랜드 서부의 작은 마을에 살던 네이선 주커먼은 고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머리 린골드를 만난다. 머리는 주커먼이 어릴 적 자신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아이라 린골드의 형. 아흔 나이의 선생님은 이제 40대가 된 제자에게 동생에 대한 숨겨졌던 얘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대화와 50여 년 전 아이라의 모습이 교차하며 소설은 진행된다. 그렇기에 아이라에게 초점을 맞추면 소설은 한결 선명하게 읽힌다.
필립 로스
아이라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파멸의 길을 걷고, 이를 폭로했던 이브도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다. 정체도 불분명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은 처연하다. 그 뒤에는 매카시즘으로 재미를 본 정치인들이 있다. 작품 중간에 6·25전쟁과 한국 파병을 결정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아이라의 열변은 흥미롭다.
‘뇌가 반이라도 있는 미국인이라면 북한 공산군이 배를 타고 6천 마일을 건너와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믿겠니.…트루먼은 공화당원들한테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는 거야.…무고한 한국 민중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어. 한국에 쳐들어가 그 개자식들을 폭탄으로 쓸어버리겠다 이거지. 알겠니? 이게 다 이승만이라는 파시스트를 지원하기 위해서야.’
아이라는 철저한 이론가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평등과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 머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브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한 게 아닐세.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갈망한 남자와 결혼한 거야.”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