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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한 번만 더 하고 종필이한테 넘겨줄 거야”

입력 | 2013-05-13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5>유신의 서막, 3선 개헌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3선 개헌안에 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왼쪽 사진). 개헌안은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3선 개헌안은 공화당 원로 청람 정구영 선생(오른쪽)조차 반대할 정도로 공화당 안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동아일보DB

시계를 잠시 되돌려 1969년 5월 7일 청와대로 가보자.

당시 공화당 대변인이었던 김재순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김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는 (3선 개헌) 반대입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나, 한 번만 더하고 그 이상은 안할 테야. 다음에 (김)종필이한테 넘겨줄 거야. (그러니) 도와줘.”

김 의원이 이에 지지 않고 “그러고 나서 또 하신다고 하면 어떡하시겠습니까?”라고 따지듯 말하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 내 성을 갈겠어.”

이상은 ‘정구영 평전’(예춘호 지음) 400쪽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당시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임기는 71년까지였다. 임기는 4년으로 두 번까지 허용됐다. 세 번 연임을 하려면 헌법을 바꿔야 했다.

‘정구영 평전’에 따르면 3선 개헌 이야기는 1968년 10월 무렵부터 공화당 안팎에서 귀엣말로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9년 새해 벽두인 1월 7일 길재호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민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포함해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다면 검토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헌법이 있는 것이지 헌법을 위해 나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발언이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림으로써 공식화된다.

이후 5월경부터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 찬성 서명을 각개격파 식으로 받기 시작했던 공화당 내 개헌추진 세력들은 박 대통령에게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각하께서 직접 설득해 달라”고 청한다. 이에 따라 당 대변인이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 의원을 대통령이 직접 만난 것.

김 의원은 청와대 회동 이틀 뒤인 5월 9일 ‘개헌 문제에 관해 국민의 진지한 고려가 있기 바란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공화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개헌 논의를 촉구한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를 이슈로 내걸고 6·3시위를 했다가 궤멸 상태에 빠졌던 학생운동권이 ‘3선 개헌 반대’를 이슈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개헌으로 가는 길은 공화당 안에서도 쉽지 않았다. 당 발기인이자 창당 준비위원이었으며 총재, 당의장까지 지낸 원로 정구영 의원(1978년 작고)이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

청람 정구영은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던 원로였다. 일제 때 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는데 변론이 치밀하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 마산시위 때에는 대한변협 회장으로 진상조사단을 현지로 파견한 뒤 “민주주의의 비참한 도살행위”라고 규탄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5·16 후 박정희 정부는 6·3으로 위기를 맞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청람을 영입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청람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초반에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박 대통령도 청람이 청와대 비서실의 전횡을 비판하고 월남 파병을 반대하자 차츰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선 개헌으로 정면충돌하게 된 것이다.

청람은 개헌에 찬성해달라고 자신을 설득하러 온 보안사령관 김재규 소장에게 이렇게 비감한 심정을 전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군정 연장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네.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정권교체네. 이건 지상명령이네. 장기집권은 부정부패를 수반하네. 권력이 1인체제로 되고 장기화되면 부패가 생겨나고 그리 되면 바로 그 부정부패 때문에 권력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네. 지금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네. 나도 (박)대통령의 영도력을 신뢰하고 그분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못한 점에서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사리가 이러한데 어떻게 3선 개헌을 할 수 있는가? 이 나라의 헌법은 존중되어야 하네.”(‘정구영 평전’)

결국 청람은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1972년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1월 공화당을 아예 탈당해 버린다. 원하기만 하면 집권 여당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한 노년을 보낼 수도 있었건만 같은 해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만들어지자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4년 뒤 세상을 떴다.

청람은 한마디로 ‘선비’였다. 생전 한승헌 변호사와의 대담에서 그가 말한 ‘지식인의 자세’는 요즘 들어도 울림이 크다.

“지식의 양(量)도 물론 중요한 시대다. 그러나 아는 지식을 얼마나 올바르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지의 폐해도 무섭지만 식자(識者)의 자세에 따라서는 유식(有識)의 해악이 더 크다는 걸 느낀다.”

다시 시계를 돌려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반.

본회의장 길 건너편 국회 제3별관에 모인 공화당 의원들은 3선 개헌안 국민투표법안을 자신들만이 참가한 단독 국회에서 2분 만에 통과시켰다. 야당은 무효를 주장했고 학생들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65.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서울만 해도 40%가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고 참가자 가운데 53%가 반대표를 던졌다.

이번에도 부정 불법선거 시비가 컸다. ‘행정기관 사업체 통해 대리투표’(1969년 10월 15일자 동아일보) ‘곳곳서 무더기 표 발견, 선관위원장 도장 없는 찬성표도’(10월 18일자 동아일보) ‘공무원 등 8명 사전대리 투표 혐의로 구속, 16명 입건’(10월 18일자 경향신문)

신민당의 유진오 총재는 국민투표 전 “3선 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승인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2년 뒤인 1971년 4월 세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 않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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