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오르면 藝人… 내려오면 여전히 천대받는 무당이오”
12일 서울 자택에서 다소곳이 한복을 차려입은 김금화 선생(오른쪽)이 홍태한 중앙대 민속학과 강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 번에 2시간가량 진행되는 구술채록은 향후 문화재청에서 영상 및 기록 자료로 제작해 일반인에게도 공개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곱게 빗어 쪽 찐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한숨에 밴 떨림은 세월의 주름일까. 얘기를 잇든 말든 연분홍 저고리는 하늘하늘. 뒤편 제단 일월성신(日月星辰) 천지신명은 울긋불긋 무심하다.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무당’ 김금화 선생(82)의 집은 꽤 후덥지근했다. 뙤약볕 마당 복슬강아지는 연신 혀를 날름날름. 날씨도 한몫했지만 좁다란 방에 대여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으니. 그 열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을까. 잠시 먼 곳을 보던 김 선생이 한복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담담하니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내세울 일 없다”며 손사래 쳤다던 그도 이젠 익숙해져서일까. 대담을 진행하던 홍태한 중앙대 민속학과 강사가 내미는 물잔을 편안히 받아들었다.
“고향 떠난 무일푼 아낙이 뭔들 쉬웠겠어. 게다가 무당인데. 피죽 한 그릇, 누울 자리 마련도 눈치를 봤지. 그래도 알음알음 이북사람 연이 닿아 일이 들어옵디다. 없이 살아도 배 나려면 굿하는 게 당연했던 때니까. 별비(別備·무당에게 주는 돈)야 주는 대로 받지. 그러나 어디 돈보고 굿 치르나. 마음으로 하지. 보리 한 되라도 정성만 지성이면 목포 군산도 내려갔소. 그리 조금씩 소문나서 살림을 꾸렸어. 새끼 입에도 겨우 풀칠이나마 했지.”
하지만 인생사 원래 그런가. 먹고살 숨통이 트이자 마음이 갈수록 시렸다. 십수 년 정붙였던 지아비도 곁을 떠났다. 하긴 무당 ‘남편살이’가 어디 쉬웠을까. 가까운 벗이 혼인해도 식장은 들지도 못했다. 민간신앙은 냉대하면서 부정 탄다는 속설은 왜 그리 철석같은지. 새마을운동은 옹골찬 대못이었다. 무당을 혹세무민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무구(巫具)고 작두고 다 때려치울까…. 신 내림 받은 업보가 한스러웠다.
세상 시선이 바뀐 건 의도치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 명창 박동진 선생(1916∼2003)의 주선으로 우연히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설움이나 풀어보려 신명나게 춤을 췄다. 헌데 이게 웬걸. 천대는 어디 가고 예인(藝人)이라 극찬이 쏟아졌다. 특히 외국인 반응이 뜨거웠다. ‘토속 샤머니즘의 정수’ ‘전통종합예술의 정찬’. 해외로 초청공연까지 나갔다. 1985년 마침내 나라에서 무형문화재(당시는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그의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이젠 바라는 거 없다고. 맺힌 거 다 풀렸다고.
1995년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진혼제를 올리는 김금화 선생. 동아일보DB
문화재청이 무속 채록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당은 ‘삼국유사’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그럼에도 예우는 여전히 소홀한 게 현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의 황경순 학예연구사는 “현재 무속 종목은 김 선생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제와 제82-3호 위도띠뱃놀이를 구술채록하고 있다”며 “앞으로 동해안별신굿 서울새남굿 등 다양한 무속 문화재도 진행해 그 가치를 높여가겠다”고 설명했다.
“사실 무형문화재라고 뭔 영화가 생겼겠어? 그래도 고마운 거지. 다 학자님들, 나라님들 공이야. 우리야 배운 가락대로 꿋꿋하니 버텼을 뿐이고. 그걸 민속이다 문화재다 연구하고 아껴주는 세상이 옵디다. 구술채록에 응한 것도 그래서야. 한 자라도 더 남기면 보살펴주겠구나. 이제 떠나도 굿은 남겠구나.”
정양환 기자 ray@donga.com